사랑이란 이름의 집착
오로고소 알베르게에서 5시 30분에 눈을 떴다. 배낭을 챙기고 비스킷으로 당 보충하고 길에 나서니 6시로 주변은 아직도 어두컴컴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드문드문 드리워져 있지만 그믐달이 가깝게 보인다. 서울에서 보던 달을 여기서 보니 불현듯 집 생각이 난다. 어디서 보아도 똑같은 달은 여기가 고향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먼데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산새들의 지저귐에 새벽길이 그리 외롭지는 않다. 랜턴 불을 켜지 않아도 길을 찾아 걸을 수 있다.
산등성에 설치된 풍력 발전기의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오히려 섬뜩하게 다가온다. 호스피탈(Hospital)에 도착하니 여기에도 숙소가 있다. 순례자 한분이 길을 나서고 있다. 순례자들은 다들 부지런히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선다. 3km를 걸었을까? 피니스테라와 묵시아 갈림길이다. 한 곳에 오른쪽 왼쪽으로 동시에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곳이다. 왼쪽은 피니스테라 가는 길, 오른쪽은 묵시아 가는 길이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고 고민을 한다. 그러나 그건 고민거리가 아니다. 40:60이면 벌써 선택을 했을 거다. 60으로..... 망설일 때는 52:48 정도의 근소한 차이일 때 고민을 한다. 묵시아를 먼저 갈까? 피니스테라를 먼저 갈까?
이럴 땐 그냥 아무거나 선택을 해도 된다. 정 힘들면 동전을 던져 나오는 데로 가도 된다. 그건 근소한 차이니까. 그건 길이서 배운다. 오른쪽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은 묵시아로 가는 길이다. 길은 잠시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다가 숲길로 안내하는 카미노 표시를 따라 걸었다. 길은 인적이 드문 탓에 풀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자그마한 시내를 건너고 길은 숲길로 이어지다가 다시 포장도로를 만나고 숲길로 이어진다. 갈라시아 지방은 확실히 유칼립투스가 많아 아침부터 허브향을 풍겨주니 기분이 상쾌하다.
어제저녁은 식사시간에 진하게 타주는 커피를 다 마셨더니 잠이 쉽게 오지 않아 뒤척였다. 몸이 조금은 무겁다. 카페인 성분은 신경을 자극해 수면을 방해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걸 잘도 마시고 잠도 잘 잔다. 중독성이 있는 커피다. 둠부리아에도 예상한 대로 알베르게가 있고 시설 또한 잘 되어 있다. 여기 확실히 알베르게가 있는 걸 알았다면 이곳에 묵었으면 오늘 길이 편했을 뻔했다. 하지만 어제 알베르게도 좋았고 침대도 여유가 있었다. 마침 중년의 부부가 숙소를 나서 하루 순례길을 시작하여 외롭지 않게 같이 길을 걸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같은 순례자란 공통분모가 있기에 마음이 통하는 것 같다.
세나데 마을에는 바르가 있어 늦은 아침식사를 하려고 들렸다. 먹거리가 신통치 않다. 입에 맞는 건 커피와 바케트 빵과 비스케 몇 개로 대신하였다. 여기서 세요를 받았다. 세요는 바르에서도 받을 스 있다. 묵시아는 묵시아 코스인 산티아고에서 묵시아, 혹은 피니스테라에서 묵시아 만 걸어도 완주증을 준다.
조금 더 걸으니 동네 가게가 있어 맥주 한 캔을 사서 배낭 옆구리에 꽂고 걸었다. 갈증이 날 때 마시는 수분 섭취용이다. 묵시아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가 정차한다. 가게에 있던 아가씨가 쪼로르 달려와서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한다. 교통편이 뜸한 갈리시아 지방 시골 풍경이다.
길은 숲길과 산길 그리고 벌판을 지난다. 가축사료용 풀을 베는 농기계를 운전하고 있는 분은 아주머니다. 한두 번 일하는 솜씨가 아니고 능숙히 트랙터를 몰고 풀을 베어 차곡차곡 담는다. 여긴 농사일도 거의 기계화되어 있어 기계 조작만 잘하면 일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
고개를 넘는데 이태리에서 온 부부가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여 찍어 주니 이번에는 같이 찍자고 한다. 나도 같이 한 장 찍었다. 그들에게는 동양인이 생경하게 보이나 보다. 작은 마을 두어 개를 지나니 작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드디어 앞에 보이는 작은 산만 넘으면 대서양 바다가 보일 것 같다.
점심시간으로 가면서 꽤 더워진 날씨에 오래간만에 땀을 흘리며 언덕을 오르니 연이어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한패 거리인 남녀 다섯 명이 걷는데 다들 체력이 좋다. 이제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때 마시려고 준비한 캔맥주를 마시니 목 넘김이 좋고 갈증을 날려 보내다. 알코올기에 기분은 업되고 다 왔다는 마음에 부지런히 길을 재촉해 본다.
아직 묵시아까지는 5.5km로 한 시간 이상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길은 다시 왼쪽 포장도로로 이어지다가 다시 숲길과 바다로 나가는 길로 이어 진다. 바다 색깔이 애메랄드 빛으로 곱고 깨끗하게 펼쳐진다. 작은 백사장이 있는 해변이 대서양으로 스페인의 끝 해안까지 왔다. 이제 데크길로 이어진다. 그 데크길은 해변을 따라 묵시아로 이어진다. 느지막이 만난 다섯 명의 이태리인들과 같이 묵시아로 간다. 해변 바닷길이 아름다운 묵시아의 첫 얼굴이다.
성모님이 작은 배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 서부지역 선교를 위해 묵시아에 와 있던 야고보 사도를 도와주시려고 이곳에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성모 발현지 중 하나로 묵시아를 꼽는다. 묵시아를 한 바퀴 돌고 알베르게를 찾았다. 공립 알베르게는 묵시아 입구 쪽에 있었다. 하루 숙박에 6유로로 저렴하고 주방시설도 있다. 순례자가 몇 분 없어 주방을 쉽게 이용할 수 있겠다.
여유롭게 사간을 보내고 마을 나들에 나섰다. 반도의 끝인 묵시아 성당으로 가서 바위산인 코르피노 전망대를 올랐다. 여기서 묵시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대서양 바다도 시원스레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다. 인연은 묘한 것. 여기서 순례길에서 두어 번 만나 같이 길을 걸었던 서울 경찰청팀을 다시 만났다.
사하군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침에 같이 걸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났다. 그분들은 이틀 늦게 산티아고에 도착하였고 산티아고 보스케 민박에서 순례차를 타고 오늘 묵시아와 피니스테라에 답사를 왔단다. 그 부부가 산티아고에 온 사연은 아주머님이 가톨릭 신자인데 혼자서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하여 아내가 홀로 한 달 넘게 먼 외국을 걷는 게 불안해 퇴직하고 함께 걷게 되었단다. 산티아고 길을 걸어 보니 오길 잘했다고 하셨다.
부인은 평소에도 산행을 좋아해서 거인산악회와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체력을 단련해 오신 분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배낭을 다음 알베르게로 보내고 가볍게 걷곤 하셨다. 그분들께 부탁하여 판초산(Facho) 코르피노 전망대 돌 십자가에서 사진을 남겼다. 전망대를 내려가면 바닷가에 묵시아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수년 전 화재로 소실되고 새로이 건축한 성당이다. 특이하게도 이 성당은 배가 성당 전면에 있다. 그건 성모님이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도와주러 오실 때 돌배를 타고 오셨는데 그 돌배를 상징한다.
그 옆에는 돌로 된 기념탑이 있는데 그건 묵시아 앞바다에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되어 일대가 기름으로 오염되어 제거 작업을 하였는데 그걸 되새기려고 기념탑을 세웠단다. 다시는 그런 사고가 발생되지 않길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아마 태안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 같은 일이 여기도 발생되었던 것이다.
숙소에 돌아와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지어먹고 쉬다가 일몰시간에 맞추어 바위산인 코르피노 전망대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 서서히 지는 대서양의 일몰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게 한다. 모르는 남은 미워하지 않으면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때로는 미워하는 이유는 상대를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미움을 만들어 낸다. 사랑이란 너를 내 관점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너의 관점에 맞추면 사랑은 더욱 돈독해질 텐데 자꾸만 집착하는 나를 다시 본다.
대서양의 일몰은 바다색과 하늘색이 같은 코발트 색인데 이런 색은 어릴 적 맑은 하늘이 있던 시골에서 보았던 그런 색이다. 묵시아 성당을 배경으로 시시각각 변해가는 일몰 장면을 가슴에 담아본다. 많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은 일몰 풍경이고 아름다운 묵시아의 밤이다. 여길 걸어서 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걸어서 힘들게 왔기에 더욱 정이 가는 묵시아다. 코르피오 전망대의 십자가에서 보는 대서양은 가슴을 탁 트이게 했고 묵시아 성당은 내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고생한 보상을 받는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