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과 레깅스 사이

패션은 언제까지 도덕의 언어여야 할까?

by 무스꾜

며칠 전 SNS 타임라인을 스치던 한 장의 사진. “이란 근황, 히잡 안 씀.” 짧은 문장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 밝은 미소, 그리고 드러난 머리카락이 담긴 사진이 올라왔다. 그 밑에는 금세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이슬람 혁명 전엔 다 미니스커트 입고 다녔다더라.” “요즘은 부유층이나 유학생만 히잡 안 쓴대.” “테헤란은 원래 아시아의 파리였어.” 사람들은 여전히 ‘히잡을 벗은 여성’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읽는다. 히잡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이란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스크롤하다 멈췄다. 이상하게 불편했다. 왜 누군가가 ‘히잡을 벗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이렇게 큰 뉴스거리가 되는 걸까. 그리고 그 불편함의 감각은, 생각보다 낯익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에서 여성의 머리카락은 공공질서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히잡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었고, 그 천 한 조각이 국가의 도덕, 신앙, 질서를 상징하게 됐다. 벗는다는 건 단순한 취향의 표현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거리에서 히잡을 벗고 걷는 여성의 모습은 패션 화보가 아니라 정치적 선언문이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다’라는 메시지를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명확하게 시각화하는 행위. 패션이 그 어느 때보다 직접적인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의 옷차림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때로는 아파트 단지 분수대의 비키니가, 때로는 등산로의 레깅스가 도마에 오른다. 공공장소에서의 노출, 회사의 복장 규정, 면접장의 ‘단정함’. 법으로 강제되지 않아도 사회의 시선이 대신 통제한다. 패션은 자유의 언어라지만, 여성에게 그것은 감시의 문법이기도 하다. “어디까지 괜찮은가”를 계산해야 하고, 옷차림은 언제나 ‘상황에 맞는지’를 기준으로 판단된다. 노출의 정도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정도가 여전히 복장의 기준이다.


어쩌면 그 불편함은 아주 오랜 시간 길러진 감각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맨살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공연음란처럼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그것은 도덕의 문제이고, 불안을 자극하는 신호다. 하지만 그 감정은 시대가 만든 학습의 결과다. 불과 몇십 년 전, 한국 거리에는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경찰이 있었다. 치마 길이를 재기 위해 자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왜색풍’이라는 이름으로 화장과 짧은 치마, 구두 굽의 높이까지 검열하던 때가 있었다. 여성의 몸은 그때 이미 국가의 도덕을 상징하는 무대였고, 그 유산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옷차림을 보고 ‘그럴 수도 있다’보다 ‘그래도 되나?’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개인의 불쾌함이 아니라 세대가 물려받은 통제의 감각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노출은 더 이상 도덕의 문제라기보다, 기후와 실용, 자기 표현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오늘날의 미니스커트나 크롭티, 레깅스는 시선을 끌기 위한 의상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움직임과 온도를 찾는 옷이다. 몸을 숨기기보다 존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옷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비난이 아니라, 단 하나의 질문이다. “그 불편함은 정말 그 사람의 옷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배워온 시선 때문일까.”


히잡을 벗는 일과 레깅스를 입는 일. 서로 다른 나라의 풍경이지만, 둘 다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여성의 옷차림은 왜 여전히 사회의 도덕을 대신해야 할까?” 패션은 언제나 사회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은 지금, 오래된 시선의 얼룩을 비추고 있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에서 시작된다. 아마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이 낯선 감정이, 다음 시대의 드레스 코드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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