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고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둠 속을 걷던 마음은 서서히 회복되어갔다. 숨통이 트이자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의 틈을 타고 주변에서는 둘째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나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둘째는 언제 가질 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임신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둘을 갖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하지만 직접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내가 소위 말하는 ‘육아 체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 번 해봤으니 둘째는 더 수월할 거라는 위로 섞인 조언도 있었지만, 나는 그 지독했던 어둠의 터널로 다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아이가 돌이 지나서야 “이제야 아이가 예쁘다는 게 뭔지 알 것 같다”라며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신생아 시절엔 그저 먹이고 재우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아이와 교감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이 통하고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하니 비로소 부성애가 피어났다고 했다. 그의 뒤늦은 고백에, 나는 안도와 공감이 섞인 고마움을 느꼈다. 모성애든 부성애든 아이를 낳는 순간 자동으로 발급되는 인증서가 아니라는 것을, 남편과 나는 이제 경험으로 아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둘째를 갖지 않기로 했다.
동생 부부는 10년이 넘는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들은 결혼 전부터 아이 없는 삶을 합의했다. 각자의 삶을 충분히 즐기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딩크 선언을 들은 아빠는 "아이가 있으면 사는 재미가 다르다"며 아쉬워 했지만, 엄마는 오히려 "애 없이 홀가분하게 즐기라"며 응원했다. 동생 부부는 시간이 맞으면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아이를 낳고 난 뒤 우리 부부에게 ‘자유’란 사라진 단어였다. 무언가를 ‘혼자’ 한다는 것은 연례행사 같은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종종 들려오는 동생네의 여행소식을 접하며, 딩크를 꿈꿨던 한때를 떠올렸다. 아이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은 확실히 달랐다. 아이가 없었다면 인생이 더 즐거웠을까,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을까, 노후는 더 깊이 있는 취향으로 채워졌을까. 나는 답이 없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언젠가 지인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며 딩크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부부는 아이가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꼭 필요한 존재라고 했다. 아이 없이는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게 부부 관계라는 이유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부부의 믿음을 아이로 채워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방증 아닌가. 아이가 있든 없든 서로의 곁에 있겠다는 확신이 있다면 딩크로 산다 해도 상관없는 일 아닐까. 하지만 아이가 부부 사이를 더 끈끈하게 이어준다는 그 말이 며칠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 아이가 없었다면, 나와 남편은 훗날 쉽게 헤어지는 사이가 되었을까.
아이가 어릴 때 열성경련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 기억 때문에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남편과 나는 혹시나 새벽 동안 열이 오를까 노심초사한다. 결국 새벽에 열이라도 오르면 우리는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아이의 열을 내리기 위해 분주해진다. 내가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고 있으면, 남편은 구급상자에서 아세트아미노펜과 덱시부프로펜을 꺼내 교차 복용을 준비하고,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아이를 돌본다. 새벽 내내 말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안다. 아이의 열이 내려갈 때쯤 문득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 이 아이를 간절히 생각하는 사람은 저 남자뿐이겠구나. 우리에게는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가 있고, 그래서 부부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은, 단순한 ‘믿음’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없는 거구나. 우리 둘을 결속하는 사랑 보다 더 크고 무거운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아이겠구나.
나는 딩크로 사는 삶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반대로 그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이 눅눅하고도 뜨거운 세계를 알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는 둘째는 사랑이라고. 첫째 때는 보지 못한 예쁨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는다고 말한다. 딩크로 사는 사람이 우리의 삶을 알지 못하듯, 하나만 낳기로 한 우리는 둘이 있는 가족의 세계는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아이도 만날 수 없는 그 세계를, 가끔 상상해본다.
경험하지 못한 선택지에 대한 미련은 무의미하다. 삶은 결국 내가 내린 선택을 책임지고 만족해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각자가 선택한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서로 다른 세계를 존중하는 유일한 방식임을, 나는 딩크로 살지 못한 삶을 아쉬워하고, 둘째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를 채찍질하고 나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