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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Oct 28. 2021

낯선 나이 듦

내 나이에 적응 할때

 세기의 요정이라 불리던 오드리 헵번이 예순을 넘겼을 때 주변에서 젊고 청순한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얼굴 주름살을 없애는 수술을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햅번은 그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 주름을 만드는데 60년이나 걸렸는데 단번에  이걸 수술로 없애기 싫습니다. 내 육십 년의 삶의 노력을 간직 하는 게 순리지요."

정확한 발언은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모르고 나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라 진위 파악은 어렵지만, 햅번이 이후 죽기 직전까지 세계의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생각해 볼 때 참말임에 틀림이 없다.


 삶의 흔적을 간직한 얼굴과 주름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면부터 긴 세월 차곡차곡 쌓아온 내면이 뒷받침을 해주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연세가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연륜에서 나오는 삶의 혜안에 감탄을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며, 세상에 뒤처지고 주름살 투성이의 추레한 외모로 상징되는 것일까? 아마 자신은 저렇게 늙지 않을 거란  젊은 사람들의 오만이 빚은 이미지이지 않을까.  그러나 나 자신도  나이 듦을 이해하기보다 다른 세기에 살다가 갑자기 첨단 문명의 세상에 나타난  문명화 덜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나부터 나잇값 하고 살아야지 하지만 내 나이도 어느새 중장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깜박하며 젊다는 수식어를 여전히  나에게 붙이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던가?


 일전에 망박 박리로 대학병원으로 안과 진료를 보러 갔을 때, 복잡한 안과 시력 검진실 겸 대기실로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 한 할머니가 아들인 듯 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남자가 간호사에게 서류를 건네자 간호사가 묻는다.

“보호자 분, 할머니 인지 능력은 이상이 없으신가요?”

“아 그럼요. 정정하십니다”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정신이 퇴보한 사람 취급하는데 기분이 상한 듯 간호사를 향해  낮으면서 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우선 진료 전에 몇 가지 검사를 먼저 할게요. 할머니, 저기 발바닥 스티커 위에 서서 왼쪽 눈 가리실게요.”

나는 ‘가리실게요’라는 말이 몹시 거슬렸다. 눈을 자신이 가려 준다는 말인지, 스스로 가리라는 말인지, 애매한 경어체를 쓰며 할머니 인지력 운운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나의 예상대로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닥에 붙은 발바닥 스티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남자가 할머니에게 ‘엄마 저기’라며 표식을 가리키자 할머니는 걸음을 떼고 발바닥 모양에 꼭 맞추어 자기 두발을  올려놓으려 애썼다. 그러나 영 중심이 안 잡히는지 몸이 자꾸 휘청거렸다. 아들이 재빨리 할머니를 부축하자 할머니는 곧게 서 한쪽 눈을 가리개로 가렸다. 간호사가 시력검사표의 가장 큰 글자를 가리켰다.

“여기 보이세요?’

간호사의 질문은 또 잘못됐다. 역시나, 할머니가 대답했다.  

“응, 보여.”

“아이 그게 아니고 뭐가 보이세요?”

젊은 간호사는 짜증부터 낼게 아니라 질문을 수정 할 생각부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역시나 할머니도 짜증 난 듯 언성을 높였다.

“보인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할머니의 대답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진 아들이 할머니에게 설명을 했다.

“엄마, 저기 보이는 숫자가 몇인지 말하는 거야. 알잖아? 안 보이면 안 보인다고 하면 돼.”

“알아, 알아.”

할머니는 아들에게도 역정을 냈다. 하지만 눈가리개로 여전히 한쪽 눈을 가리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은 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문득 할머니가 문맹일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시각표의 숫자와 글자들을 아들에게 말했다.

“구멍 뚫린 동글뱅이도 보이고,  새도 보이고  숫자 사도 있고 칠도 있고 밑에는 육도 있고…….‘

“아이참.” 아들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그 광경을 프런트에서 지켜보던 사십을 훌쩍 넘긴 듯 보이는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 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나 질문은 아들에게 향한 것이었다.  

“저 차라리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단일 그림으로 검사할까요?”

아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간호사가 컴퓨터를 두들기자 흰 벽에 흔한 시각표 대신 그림이 떴다. 나이 든 간호사가 막대기로 자동차 그림을 가리켰다.

“가만있어보자, 구룸마녜.”

자동차 그림을 보고 ‘구루마’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말에 이제 웃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구부정한 할머니가 문맹이라 선입견을 발동한 나 자신이 멋쩍어 간호사의 이상한 경어체에 대한 불만이 사라졌다.

 

 의사가 나의 눈을 보며 수술 안 한 쪽 눈도 노안과 백내장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나 정신과 달리 몸은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생겼다.

“어머니, 다음 진료 스케줄 잡게 이쪽으로 오세요.”

간호사가 나를  ‘어머니’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하니까 딴 사람 부르는 것 같고 너무 이상해요.”

나는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 딴지 걸듯  말했다.

“어머, 그럼 뭐라 불러요?”

너무 당당하게 반문하는 간호사에게  나는 당황했다. 이 기싸움에서 나는 '어머니'란 말로  넉 다운 당해 수세 몰렸지만 지지 않으려 끝까지 기를 썼다. 기어코 나는 간호사를 향해 하지 않아도 될 한마디를 내뱉으며 돌아섰다.

“이름 있잖아요. 부르라는 이름 두고 … ”

이 정도면 일침은 놓은 거지. 진료 예약 표를 받아 들고 꼿꼿하게 걸어 나오는 내 뒤통수가 따가웠다.


 병원을 나와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는 데 안과 검사를 위해 넣은 산동제 영향인지 눈앞이 어른거리고  온 몸이 피로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라도 마시며 기운을 충전해 볼까 했지만 전염병의 시대에 즐길 사치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통유리 카페에선 노트북과 책을 펴놓고 창가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겉 멋든거야."  

  하지만 문득 카페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의 진지한 얼굴이 떠올랐다. 공부할만한 곳이 없는 이들일지 몰라. 무턱대고 자신의 기준에서 카페에 앉은 젊은이를 비판한 나도 꼰대가 돼가나 싶어 겁이 났다. 욕하면서 따라 한다고 내가 딱 그 짝이네.  

 지하철역에 들어서자 벽에 즐비한 광고판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요양병원과 치과, 안과, 피부과 등 최고의 치료를 제공한다는 광고들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교통카드를 찾느라 서서 그런 광고들을 보자니 눈이 더욱 어지러웠다. 20대 같은 40대의 얼굴을 보장한다는 피부과 광고에 나의 마음은 이유 없이 분노를 일으켰다. 나이보다 젊어 보여서 얻는 이익이 뭘까.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데 젊다는 것은 확실히 유리한 점이 있다.  하지만 젊으니까 감당할 사회적 부담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게 나도 이제 지하철 안에 빈자리 부터 두리번거린다는 것이다.

“여기  앉으세요”

내게 대학생인 듯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했다. 막상 자리가 나자 서글픔이 강타를 했다. 잠시 멈칫했지만 자리에 가 앉지 않는 것 역시 꼰대 짓이라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마스크를 써도 나이 들어 보이는구나.  게다가 나는 이제 자리 양보를 받아도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상황이 어색했다. 그러나 서있을 때보다 앉으니 편하고 좋았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라떼" 선호자는 과거 지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팔팔하던 시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든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 신체의 노화에 따른 내 활동 범위를 수정하고 적응해야 하는 것... 과거를 벗어나 계획이 필요하다.


나도 늙어간다는 것은 사실이고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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