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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Jul 01. 2022

김만덕과 마릴린 먼로

암환자의 생애 첫 제주 여행 2

암환자의 생애 첫 제주 여행 2

 지난 일요일 오후 제주에 도착해 호텔로 가는 길에 포기해야 할 것과 놓지 말아야 할 것을 정리했다.  여행의 가장 큰 재미는 지역 특색 가득한 음식을 현지에서 맛보는 즐거움이라지만 나는 고민 없이 음식을 먼저 포기했다. 즐비한 횟집과 갈치 요릿집, 흑돼지 요리점, 그리고 제주 감귤까지 암환자로서 내가 먹지 말아야 할 것과 원래 안 먹는 것들의 집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주 시내에서 머물며, 제주를 대표할 음식마저 포기하다 보니 본격 제주를 느끼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제주다움이란 제주사람이 사는 시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했다. 실제로 일상에서 한걸음 떨어진다는 여행의 묘미는 나름 충분히 느꼈는데 나를 벗어나 김만덕과 마릴린 먼로가 줄곧 내 머릿속을 차지한 덕이었다.

전재산을 털어 전라도에서 쌀을 사 와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 백성을 구한 김만덕  조형물

 유난히 쌀가마니가 많았던 기억만 남은 김만덕 기념관을 가장 먼저 갔다.  객주까지는 더위와 바람을 뚫고 갈  엄두가 나질 않아 다음을 기약했다. 의인 김만덕의 일생이야 드라마로 잘 알고 있지만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양인환원"이라 하여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행수기생이 된 그녀가 자신의 양인 신분을 회복하여 객주를 운영하여 거상이 되었다는 도전 정신이었다. 신분제와 남존여비 사상 철저하던 조선에서도 제주는 척박한 환경으로 남녀노소 , 심지어 양반들도 노동을 해야 살 수 있었다 하니 원래도 올곧은 성정이었겠지만 조선시대 여성임에도 자립적인 태도는 어느 정도 제주라는 환경에서 완성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조대왕으로부터 "의녀반수"라는 벼슬까지 받아 금강산 유람까지 한 이야기 속에서 도전과 나눔 정신 외에 비혼 여성의 홀로서기 정신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영웅호걸의 이야기에 감명받듯 그런 감상 같지만 오십을 넘어 생과 사의 굴곡에 줄넘기하는 내가 지향해야 할 정신을 일깨웠다고나 할까. 앞으로도 내가 돈을 벌어 김만덕 같은 거부가 되어 재산을 분배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쌓아온 지식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나누며 한 두 사람이라도 공감과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도덕교과서 같은 생각이라 나도 낯설지만 김만덕이라 인물이 내게 도전 용기와 희망 준건 확실하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잠시 쉰 후 찾은 곳이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관이었다. 나는 이름만 보고 영화관인 줄 알고 내부를 볼 생각은 아니었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해안가에 즐비한 호텔 몇 개를 지나니 탑동 광장 끝부분에 빨간 건물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서 도대체 일기예보는 이런 날씨에 왜 폭우라고 했을까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말이 일기예보라 다시 확인하며 더위를 피해 커피나 마시려 들어선 내부는, 들어서자 바로 전시관 시작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2005년까지 제주시민들이 애용하던 진짜 영화관이었던 곳이라 시네마란 이름이 붙었단다. 지하부터 5층까지 건물 자체가 전시 품이자 전시 공간이었다. 여타의 미술관보다 가장 현대 미술 전시에 최적화된 느낌이었고 나처럼 계단이 버거운 장애인도 쉽게 관람할 수 있게 넓은 엘리베이터가,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도 비디오 아트가 벽면을 장식하며, 편리하게 배치돼 있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2층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눈에 들어온 것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였다. 서울 시립미술관 앤디 워홀 전시 때도 봤었는데 제주의 마릴린 먼로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 전시물의 배치가 한 몫했다는 느낌이다.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와 듀엘 핸슨의 벼룩시장 상인

 시대의 상징이자 샤넬 향수,  패션과 금발로 뇌쇄적 관능미의 대명사,  20세기 대중문화의 축을 형성한 먼로가,  팝아트로 다양한 색으로 복제된 그녀의 얼굴은 가장 대중 친화적이며 동시에, 덧입혀진   울긋불긋한 색체에 현실과 괴리되었다는 낌으로 다가왔다. 대중의 동경의 대상이던 스타의  삶과 소비하는 대중의 남루한 척박함의 조화라니... 섬뜩한 기시감이었다.  앤디 워홀의 릴린 먼로 앞 기둥에 전시된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 듀엘 핸슨의 '벼룩시장 상인'은  관람객으로 착각할 정도로 진짜 사람과 같은 후줄근한 모습에 놀랐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  뭔가 응시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  먼로를 지척에 두고 딴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듯한 배치,   공허한 내 모습의 발견이었다.


세상에서 튀어 오르고 싶어  수록 세상에 함몰되는 나. 이어진 생각은 나는 왜 열심히 미술관을 찾는가? 현실의 초라한 내 모습을 발견하려고? 대중예술이라는 팝아트조차 범접할 수 없는 자본에 힘에 지배를 받아, 내 형편으로 범접할 수 없으니 잠깐 눈에 담아 보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을 허영심으로 달래려고?  

벼룩시장 상인이 섬뜩할 정도로 사람 같았다.

아니다. 나는 일상이 예술로 표현될 때 가치를 메길 수 없는 숭고미가 생긴다고 믿는다. 일상이 예술로 재현되고 표현되는 방식을 통해 우리네 일상은 숭고해지며 승화된다. 이런 예술을 통해 나의 존재가 하잘것없는 미물이 아니라 숭고한 미학의 범주에 들어설 가능성을 맛볼 수 있기에  나는 나의 가능성을 염탐하고 싶어 한다.  듀엘 핸슨의 '벼룩시장 상인'으로 내가 전시된 것 같은 슬픈 현실 공감은  이어 위층에 올라가 마주친 조지 시걸의 "우연한 만남"을 마주하며 묘한 실존의 쾌감을 느꼈다.  

조지 시걸의 우연한 만남

"일방통행로"라는 표지판에 밑에 모인 사람들, 각자 일방통행로로 떠나 갈지 아니면 그 길을 끝내고 만났는지 모르지만 저들이 수군대며 공유하는 길의 정보는 그 길이 그 길이다. 어느 길로 가든 마찬가지란 암시처럼 내게 다가왔다. 결국 모이는 곳은 한 곳,

의인 김만덕의 도전과 성공 그리고 나눔이라는 고귀한 삶이든, 시대의 상징이 된 여자의 짧은 인생이든.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는 벼룩 상인 상인처럼 무심히 시간을  죽이든,   모두 삶의 모습이다. 다양 삶이 시공간 속에 지속되는 것처럼  나의 길을 가면 만남의 광장에 도착하겠지. 뻔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니 이번 나 홀로 제주 여행은 참 잘한 짓이다.

 

관덕정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비와 더위에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할 수 있는 만큼 보고 느끼자는 생각으로 찾은 제주 관아와 관덕정은 그야말로 대미를 장식하게 했다.  월요일 아침고 폭우가 내릴듯한 날이라 나와 어떤  젊은 여자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정말 고즈넉하게 걸으며 제주의 바람 소리를 전하는 나무를 감상하는 것은 젖 먹던 힘까지 뽑아 기를 쓰고 찾은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제주 목 관아에서

건물이야 옛 건물 많은 곳에 가면 으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옛 제주관아에서 관할하던 제주 식물원을 복원해 놓아 갖가지 종류의 귤나무와 꽃을 볼 수 있어 제주에 와서 귤나무도 못 보고 가네라고 서운했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제주도 여행 경험자 되었다. 항암 중인 암환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수준에 맞는 최소의 움직임을 전제한 최선 여행 코스를 선택했으나 결과는 최상이었다.

제주 목관아 입구의 소 조형물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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