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지긋지긋했던 신림동을 뛰쳐나와 늦은 나이에 가출을 하고,
그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고시원의 1평짜리 빈방을 얻고,
첫 직장을 구한 후, 은행에 처음 대출을 하러 갔다.
일용직 3.3% 신분.
나는 그곳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받을 자격을 입증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거라고는 신용대출, 이자율도 꽤 높았다.
그래도 바들거리며 최대한 받게 해달라고, 나 돈 필요하다고.
그래서 받은 대출이 500만 원, 나의 첫 대출이었다.
그리고 뒤돌아서는데, 예쁘장한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너, 걔 맞지? 야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잖아!"
'아, 여기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구나.. 직급.. 꽤 높네...'
"회사가 여기 근처야? 어! 나 여기서 근무해! 반갑다! 잠깐 기다려봐."
빨간 얼굴로 나에게 회색 양말을 내민다.
500만 원.
회색 양말.
나는 그때 그곳을 도망치듯 나왔던 것 같다.
반가움도 잠시, 그러다 내려다보면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회색 양말 한 짝.
초라한 눈물이 고였다.
내 젊은 시절을 고시원에서 다 보내고, 이제 첫 직장을 겨우 구했는데...
억울한 마음으로 돌아갈 곳은 또 1평짜리 고시원.
그렇다고 내가 이것 외에 뭘 할 수 있나 싶었다.
그리고 10년 후, 마이너스 통장을 발급받았다.
한도 2000만 원.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네.
이전에 비하면 4배 가치가 오른 건가.
44세,
5평 원룸,
직업과 직업 사이,
대출 연장을 하라기에 다시 찾은 은행.
직원의 반짝거리는 손톱과 반지, 타닥거리는 차가운 키보드 소리.
빛바랜 내 외투, 까슬한 내 손톱, 긴장된 서글픔에 괜히 해보는 헛기침.
"직업이 없으시다고요? 그럼 직장인 대출은 안 되는데..."
"대신 이자율이 좀 높지만, 다른 대출 알아봐 드릴게요. 안 될 수도 있어요."
어찌저찌 대출을 연장하고 터덜터덜 은행을 나선다.
여전히 내 가치는 2천만 원인 건가.
주중도 주말도 없이, 끼니도 못 때우고 일해서
나는 여전히 2천만 원어치의 인생.
터덜터덜 도서관 구석으로 발을 뗀다.
맥박처럼 울리는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