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여러분은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그림을 본 적이 있으세요?
시간의 유한성을 상징하는 시계를 그린다거나, 미래에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해골을 그려 놓는다거나 하는 상징적 수법 말고, 정말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보여주는 것 말이에요.
제가 본 딱 그런 그림은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입니다.
정말로 한 인체가 계단을 스르르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추상적으로 표현한 인체의 구조와, 움직임에 따른 자세의 변화를 자세하게 연구하고 그것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것입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학교 호그와트의 그림들은 화폭 안에서 마법처럼 움직이지만, 이건 진짜 그냥 그림인데도 마치 그 마법이 눈 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1900년대 초반.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가 점점 더 활짝 열리고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1800년대에 시작된 사진 기술은 이제 사람이나 동물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촬영해 움직임의 과정을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위의 그림을 그린 마르셀 뒤샹도 펜싱 동작이나 달리는 말을 연속촬영한 사진 작품들을 보았고 거기에서 움직임, 속도 등을 표현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해요.
여튼 마르셀 뒤샹의 이 그림은 모던 아트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근데...
"마르셀 뒤샹" 하면 떠오르는 어떤 이상한 작품이 있지 않나요? 그... 뒤샹의 '샘'...이라는 변기?
맞아요! 1917년에 뉴욕에서 열린 독립예술가들의 전시회에 떡 하니 남자용 소변기를 갖다 놓아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 사람이 바로 마르셀 뒤샹이에요.
뒤샹은 이 즈음 이미 "기성품"을 "발견"해 예술작품이라고 전시하는 "Readymade"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변기를 갖다 놓은 거냐는 질문을 받자,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평범한 일상의 물체들이 예술가의 선택이라는 행동에 의해 예술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지랄.
이렇게 내뱉으며 휙 지나가도 상관 없겠지만, 혹시 2024년 말에 바나나 하나를 테이프로 벽에다가 떡 하니 붙인 작품이 6백만 달러도 넘는 가격에 팔렸다는 기사 읽으신 적 있나요? 그 비싸고 귀하신 몸이 바로 아래의 작품 <코미디언>입니다. 단순히 바나나만 붙인 것은 아니고, 올바른 전시를 위한 상세한 도안과 지침, 그리고 이것이 진품이라는 증명서와 함께 구성된 작품이라는군요.
와.. 이거 장난하는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맞습니다. 근데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오늘날의 이 작품이 가능하도록 "컨셉트 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마르셀 뒤샹입니다.
좀 말이 안되는 것 같나요? 이렇게 황당한 "예술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저게 뭐 예술이야?' 라고 헛웃음을 치게 되죠. 거기서 그냥 끝나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예술계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면 곧, "그렇다면 과연 예술이란 게 뭘까?" 라고 질문을 하게 되지요. 무엇이 저 평범한 물건을 예술이 되게 하는가, 하고요.
이렇게, 예술이란 게 뭔지, 왜 예술을 그렇게 우러러 떠받들면서 높은 가격으로 사고 파는지, 그렇게 숭앙해야 할 그 무엇인지, 예술의 본질은 뭔지, 이런 복잡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작품, 그 시초가 바로 뒤샹의 <샘>이라는 거죠.
근데 저도 이 글을 쓰며 더 공부하기 전까지는, 뒤샹이 그저 소변기를 갖다 놨다고만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정확하게는, 소변기의 일상적 용도와는 다르게 방향을 달리해서, 보통은 벽에 부착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래로 가도록 눕혀 놓았다는군요. 음, 다시 보니 정말 그러네요.
이렇게 의도적으로 일상의 사물을 완전히 다른 맥락에 놓음으로서, 사물의 그 기능을 벗어나 형태, 그 자체로서 사물을 보게 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예술이라는 거죠.
머리 아프죠?
보면 기분 좋아지는 그림... 마티스의 품으로 막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ㅎㅎ
근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현대 미술의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이미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버렸어요.
1900년대 초반에도 이미 자본주의의 쳇바퀴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주식 시장이 요동을 치고, 과학 기술은 점점 더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더 나아가서는 급기야 제 1차,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인간이 얼마나 인간말종보다 더 못한 것들이 될 수 있는지 갈데까지 다 가도록 밑바닥을 치는 거죠.
이런 세상에서 예술이란?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희망에서 나온 미래주의를 지나, 나치의 폭압과 세계대전 시절의 괴로움과 악몽들을 표현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그림들, 이상한 현실을 비웃는 듯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초현실주의가 인기를 끌고,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세상의 무의미함을 부르짖는 다다이즘 운동이 일어나고... 이게 다 현대 미술의 바탕이랍니다. 이 난장판이 곧 현대 예술인 거죠.
남긴 작품의 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마르셀 뒤샹은 위에 말한 두 작품 자체가 현대 예술에서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진짜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 특히나, 마르셀 뒤샹은 당대의 큰 손, 아트 후원자이자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이 어떤 작품을 사고 어떤 예술가를 후원하는 지에 너무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현대 미술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인물로서 정말 중요합니다.
요즘은 미술 작품이 투자 수단으로도 각광받고 있죠? 그 때문인지 미술에 대한 관심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진 것 같은데, 현대 예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면 페기 구겐하임을 더 들여다 봐야 합니다. 여기에 쓰긴 너무 길어니지까 그건 나중에 따로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