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브란쿠지
유명한 조각상, 하면 여러분은 어떤 작품이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밀로의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등이 아닐까요?
이런 작품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인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을까 싶어 넋을 잃고 쳐다보게 되는데요.
1900년대 초, 로댕이 국제적인 유명세를 떨치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루마니아 시골 출신의 한 재능있는 조각가가 파리의 로댕의 문하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채 두달도 안되어 제발로 나가버립니다.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요.
이 당찬 조각가는 "외형이 아니라 그 개념, 즉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바로, 현대 조각의 대부로 불리는 콘스탄틴 브란쿠지입니다.
제목이 <잠자는 뮤즈>인 위의 작품을 보면, 왜 브란쿠지가 20세기 현대 조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들 중 하나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잠자는 뮤즈를 표현한다면, 누워서든 앉아서든 잠을 자고 있는 인체를 표현하겠죠. 하지만 브란쿠지는 잠자는 것의 본질, 그것에만 집중해 조각을 확 단순화했습니다. 몸이 뭘 하고 있든 별로 상관 없죠. 눈을 감고 머리가 어딘가에 놓여 쉬고 있는 것. 그 모습으로 잠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브란쿠지가 로댕 문하를 박차고 나올 때 '로댕은 사물의 표면적인 모습만 표현할 뿐'이라며 비판했다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이 두 작가는 모두 <The Kiss>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비교하면 정말 재밌겠지요? 자 먼저, 당대의 대가이신 로댕의 작품을 먼저 보겠습니다.
오~ 정말 멋있죠? 두 남녀가 서로의 몸을 휘감으며 키스하는 몸짓도 잘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고개를 확 비틀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동작에서 강렬한 감정도 느껴집니다.
그럼 이제 같은 제목의 브란쿠지 작품을 봅시다.
땡~!
좀 깨나요? 하나도 안 이쁜가요? 하지만 뭐, 이쁜 사람들만 키스하란 법 있습니까?
몸의 생김새야 어떻든, '입맞춤'의 본질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게다가 입도 맞추고 눈도 맞추어 둘이 그냥 한 덩어리가 되었네요!
브란쿠지에게는 그게 바로 입맞춤의 본질이고, 그걸 표현하고 싶었던 겁니다. 로댕이 맞냐, 브란쿠지가 맞냐, 이런 게 아니죠. 둘이 지향하는 바, 표현하고 싶은 것이 다를 뿐이에요.
이 작품을 보니 갑자기 나의 초등학교 2학년 미술시간이 떠오릅니다. 빨랫비누 한 덩어리를 깎아서 조각 만들기를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나름대로 이쁜 천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기도 자세로 모으고 있는, 어깨위로 긴 머리가 흘러내리고 등 뒤에 두 날개가 펼쳐있는 전형적인 천사의 모습이요.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나 보려고 아이들 책상 옆을 하나하나 지나가며 관찰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조각한 걸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선생님께 보여드리자, 선생님은 "아니 이게 웬 납작 천사야!" 하면서 칼로 내 천사의 양 옆 어깨를 위에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사정없이 잘라내어 버리셨어요! 어린 마음에 충격...!
내 작품은, 천사의 모습을 비누의 앞 면과 뒷 면에다가만 부조처럼 얕게 파서 표현하고 양 옆면은 그대로 둔 한 덩어리의 비누였거든요. 즉, 거의 위의 브란쿠지 작품과 비슷한 수준으로 납작한(?) 조각상이었던 거에요.
조각상은 로댕의 작품처럼 재료에서 몸이 빠져나와 있는 듯이 보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선생님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작품을 보고는, 가르쳐주겠다는 마음으로 묻지도 않고 막 잘라내 버리신 거였어요. 선생님이 망쳐놓은 비누 조각상을 가지고 더 이상 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그냥 엄마한테 비누로 쓰라고 드렸던 것 같아요. ㅎㅎ
우리 시대에도 이런데, 고전적인 조각상의 모습에만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브란쿠지의 작품이 금방 예술이라고 받아들여졌겠어요? 한 눈에 딱 보고, "와~ 신선하다! 이거 진짜 좋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에~ 저따위가 무슨 예술이야?"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았겠죠.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냐, 이런 논란에다 관세 문제까지 겹쳐서, 브란쿠지가 미국 법원에까지 출두하게 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된 작품은 너무나 유명한 <공간속의 새>라는 작품입니다. 아래의 사진에서 그 늘씬한 자태를 음미해 보세요.
브란쿠지는 새의 형상 그 자체보다는, 공간에서의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그 것, 그 본질, 그 개념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공간속의 새>입니다. 처음 작품은 1923년에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후 20년간 조금씩 재료나 형태를 살짝 바꾸어가며 열 네 번을 더 만들었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고요?
1926년에 브란쿠지의 이 작품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수입을 해 오는 과정에서, 미국 세관이 전혀 새를 닮지 않은 이것이 예술작품이 아니라 산업 부품이라며 40%의 관세를 부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당한 조치에 대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브란쿠지 대 미국 Brancusi vs. The United States" 이라는 법정 소송 절차가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재판관들의 심사숙고 결과, 어떤 작품이 "아름답고" "대칭적이고" "장식적"이면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이 났다는군요. 그렇게 해서 40%의 관세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답니다. 재밌죠? 이런 판례를 통해서 예술작품은 꼭 자연을 실제 모습과 같이 모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추상적인 개념 - 이 경우에는 "날아감" - 을 표현하는 것도 예술이라는 중요한 법적 원칙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죠. 현대 예술은 끊임없이 예술의 경계를 시험해보고 확장하기 위한 온갖 시도를 하는데, 이미 법원이 "아름답고" "대칭적이고" "장식적"인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했다면, 그 다음은 뭐겠어요? 당연히, 아름답지 않고, 대칭적/균형적이지도 않고, 장식적이지도 않은 것들이 예술이 되는지 아닌지 실험을 하지 않겠어요?
내 작품들이 추상적이라고 규정하는 바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가장 실제적인 것이다.
진정한 실제는 겉모습이 아니고, 사물의 본질, 그 개념이다. - 브란쿠지
여튼 진정한 예술가들은 참 담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럼 현대 예술이 어떻게 더 확장해 나가는지 다음 포스트에서 더 들여다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