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다

콘스탄틴 브란쿠지

by 정상희

유명한 조각상, 하면 여러분은 어떤 작품이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밀로의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등이 아닐까요?


이런 작품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인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을까 싶어 넋을 잃고 쳐다보게 되는데요.


1900년대 초, 로댕이 국제적인 유명세를 떨치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루마니아 시골 출신의 한 재능있는 조각가가 파리의 로댕의 문하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채 두달도 안되어 제발로 나가버립니다.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요.


이 당찬 조각가는 "외형이 아니라 그 개념, 즉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바로, 현대 조각의 대부로 불리는 콘스탄틴 브란쿠지입니다.


<Sleeping Muse> by Brancusi. 1910년 작품


제목이 <잠자는 뮤즈>인 위의 작품을 보면, 왜 브란쿠지가 20세기 현대 조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들 중 하나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잠자는 뮤즈를 표현한다면, 누워서든 앉아서든 잠을 자고 있는 인체를 표현하겠죠. 하지만 브란쿠지는 잠자는 것의 본질, 그것에만 집중해 조각을 확 단순화했습니다. 몸이 뭘 하고 있든 별로 상관 없죠. 눈을 감고 머리가 어딘가에 놓여 쉬고 있는 것. 그 모습으로 잠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브란쿠지가 로댕 문하를 박차고 나올 때 '로댕은 사물의 표면적인 모습만 표현할 뿐'이라며 비판했다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이 두 작가는 모두 <The Kiss>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비교하면 정말 재밌겠지요? 자 먼저, 당대의 대가이신 로댕의 작품을 먼저 보겠습니다.


<The Kiss> by Augustine Rodin. 1901~4년 작품


오~ 정말 멋있죠? 두 남녀가 서로의 몸을 휘감으며 키스하는 몸짓도 잘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고개를 확 비틀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동작에서 강렬한 감정도 느껴집니다.


그럼 이제 같은 제목의 브란쿠지 작품을 봅시다.


<The Kiss> by Constantin Brancusi. 1912년 작품

땡~!


좀 깨나요? 하나도 안 이쁜가요? 하지만 뭐, 이쁜 사람들만 키스하란 법 있습니까?


몸의 생김새야 어떻든, '입맞춤'의 본질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게다가 입도 맞추고 눈도 맞추어 둘이 그냥 한 덩어리가 되었네요!


브란쿠지에게는 그게 바로 입맞춤의 본질이고, 그걸 표현하고 싶었던 겁니다. 로댕이 맞냐, 브란쿠지가 맞냐, 이런 게 아니죠. 둘이 지향하는 바, 표현하고 싶은 것이 다를 뿐이에요.


이 작품을 보니 갑자기 나의 초등학교 2학년 미술시간이 떠오릅니다. 빨랫비누 한 덩어리를 깎아서 조각 만들기를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나름대로 이쁜 천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기도 자세로 모으고 있는, 어깨위로 긴 머리가 흘러내리고 등 뒤에 두 날개가 펼쳐있는 전형적인 천사의 모습이요.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나 보려고 아이들 책상 옆을 하나하나 지나가며 관찰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조각한 걸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선생님께 보여드리자, 선생님은 "아니 이게 웬 납작 천사야!" 하면서 칼로 내 천사의 양 옆 어깨를 위에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사정없이 잘라내어 버리셨어요! 어린 마음에 충격...!


내 작품은, 천사의 모습을 비누의 앞 면과 뒷 면에다가만 부조처럼 얕게 파서 표현하고 양 옆면은 그대로 둔 한 덩어리의 비누였거든요. 즉, 거의 위의 브란쿠지 작품과 비슷한 수준으로 납작한(?) 조각상이었던 거에요.


조각상은 로댕의 작품처럼 재료에서 몸이 빠져나와 있는 듯이 보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선생님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작품을 보고는, 가르쳐주겠다는 마음으로 묻지도 않고 막 잘라내 버리신 거였어요. 선생님이 망쳐놓은 비누 조각상을 가지고 더 이상 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그냥 엄마한테 비누로 쓰라고 드렸던 것 같아요. ㅎㅎ


우리 시대에도 이런데, 고전적인 조각상의 모습에만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브란쿠지의 작품이 금방 예술이라고 받아들여졌겠어요? 한 눈에 딱 보고, "와~ 신선하다! 이거 진짜 좋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에~ 저따위가 무슨 예술이야?"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았겠죠.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냐, 이런 논란에다 관세 문제까지 겹쳐서, 브란쿠지가 미국 법원에까지 출두하게 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된 작품은 너무나 유명한 <공간속의 새>라는 작품입니다. 아래의 사진에서 그 늘씬한 자태를 음미해 보세요.


<Bird in Space> in bronze by Brancusi. 1923년 부터. 위의 사진은 1928년 작품


브란쿠지는 새의 형상 그 자체보다는, 공간에서의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그 것, 그 본질, 그 개념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공간속의 새>입니다. 처음 작품은 1923년에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후 20년간 조금씩 재료나 형태를 살짝 바꾸어가며 열 네 번을 더 만들었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고요?


1926년에 브란쿠지의 이 작품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수입을 해 오는 과정에서, 미국 세관이 전혀 새를 닮지 않은 이것이 예술작품이 아니라 산업 부품이라며 40%의 관세를 부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당한 조치에 대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브란쿠지 대 미국 Brancusi vs. The United States" 이라는 법정 소송 절차가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재판관들의 심사숙고 결과, 어떤 작품이 "아름답고" "대칭적이고" "장식적"이면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이 났다는군요. 그렇게 해서 40%의 관세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답니다. 재밌죠? 이런 판례를 통해서 예술작품은 꼭 자연을 실제 모습과 같이 모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추상적인 개념 - 이 경우에는 "날아감" - 을 표현하는 것도 예술이라는 중요한 법적 원칙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죠. 현대 예술은 끊임없이 예술의 경계를 시험해보고 확장하기 위한 온갖 시도를 하는데, 이미 법원이 "아름답고" "대칭적이고" "장식적"인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했다면, 그 다음은 뭐겠어요? 당연히, 아름답지 않고, 대칭적/균형적이지도 않고, 장식적이지도 않은 것들이 예술이 되는지 아닌지 실험을 하지 않겠어요?


내 작품들이 추상적이라고 규정하는 바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가장 실제적인 것이다.
진정한 실제는 겉모습이 아니고, 사물의 본질, 그 개념이다. - 브란쿠지



여튼 진정한 예술가들은 참 담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럼 현대 예술이 어떻게 더 확장해 나가는지 다음 포스트에서 더 들여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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