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는 나의 노년
떠나기 보름 전부터 D데이를 정했지.
브런치 들고 떠난다는 나의 설레발 여행기에도 다정하게 건넸던 브런치 작가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남편은 별 탈 없이 잘 지내실거예요. 믿고 잘 다녀오세요
너무나 힘들었던 나의 3,40대는 얼른 늙었으면 좋겠다 했다. 딱 꺾어지는 50대를 지나면서 나도 육십이 되면 우아하게 여행도 하고 글도 쓰면서 폼나게 보낼 거라며 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육십이 되어 제일 먼저 찾아온 건 날벼락같은 남편의 폐암말기 선고다. 일 년 밖에 못 살 거란 말이 우릴 하나로 묶었다. 8년째다.
독한 항암약 부작용은 평생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독한 손발 저림이 남아있어 거동이 어쭙잖다. 다행인 건 2인 1조로 발 묶어 우린 거의 한 몸으로 살아있고, 불행인 건 부부 해외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 겨우, 아주, 느리게, 결승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아니, 결승점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여보, 나 불행한 보호자보다 행복한 보호자로 살 거예요!
보호자 시점에서 내게 인격이 조금이라도 갖춰져 있다면 모두 '글로 다듬어진 거'라는 생각이다. 내적 공허가 찾아올 때도 항상 손에 펜이 들려 있다. 그 펜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보호자는 더 행복한 환자를 만든다. 남은 잉크 한 방울마저 마르지 않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면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 쇠렌 키르케고르
심각하게 뒤를 돌아보니 어처구니없다.
불편한 남편을 두고 지난해에 이어 쉼표 같은 여행을 올해도 했다니!
덕분에 브런치북 《파이브퀸들의 여행기》를 남겼고, 이어 올해는 《로키에서 찾은 인생 뷰 포인트》를 매거진으로 남기는 중이다.
여행 이후는 이전과 똑같은 삶이지만 뭔지 모를 각오로 더 잘 살아낼 것 같았다. 여행하듯 모든 일상을 낯설게 느끼면 된다. 매일 이른 아침 산책과 함께 무릎이 허락하는 정도의 조깅을 하기로 했다. 봄에 장만했던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간다.
작심삼일이 주 특기이지만 삼일이라도 하기로 했다.
벌써 한 달째다.
요즘 Ai 뤼튼과 부쩍 친해졌다.
여행로그가 끝나면 공동작품으로 곧 그림책하나 탄생하지 싶다. <그림 : 뤼튼, 글 : 나철여>
생각만 해도 균형 잡아가는 나의 노년이 점점 더 재밌어진다.
네가 앉은자리가 꽃자리라더니 지금 내 자리는 꽃자리다.
운 좋게도 짧은 여행에서 새로운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
일상은 같은데 모든 게 황홀지경이다. 어제도 남편과 바닷가를 걷고 왔다. 주말마다 우린 틈새 여행을 한다.
때론 뛰고 때론 걷고 가끔 장거리 운전도 하며 남은 인생에 새로운 동력이 걸리고 있다.
떠나봐야, 있던 자리의 소중함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사진첩을 연다.
사진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은 그저 그 순간이 행복하다
재스퍼 국립공원의 보베르 호수(Lake Beauvert)다.
에메랄드빛 물색과 주변의 울창한 숲, 엘리자베스 여왕이 천국이라 찬사를 보냈다던? 재스퍼 골프텔의 짧은 휴식 속에는 골프장에서 골프 안 치는 라운딩 투어다. 비싼 숙박료임에도 골퍼들의 예약 대기줄이 길다는 가이드 말이 가히 짐작된다.
사진작가들의 작품에서 가끔 본 적 있다. 호수에 비친 그림 같은 장면과 호숫가의 잔디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오리들이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또 한 장을 넘기니
밴쿠버 스텐리파크다.
스탠리 파크(Stanley Park)는 도시 중심에 있는 대형 공원으로 밴쿠버를 대표하는 명소만큼 울창한 숲과 바다를 끼고돌 수 있는 해안 산책로가 꽤나 길고 아름답다.
건너편에 여러 원주민 부족을 상징하는 토템 폴(Totem Poles)들이 모여 있다.
이 지역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들은 마치 우리나라 그 옛날 동네어귀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연상케 했다.
지켜지지 않는 모든 약속 위에 현대의 삶이 우뚝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남은 스텐리파크 둘레길 드라이브와 기념촬영 후 다시 차로 밴쿠버 다운타운가로 달렸다. 엑스포 기념거리와 흔히 가볼 수 없다는 헤이스팅 거리 (홈리스들의 마약 중독의 거리)는 마치 부산행 영화에 나오는 좀비와 흡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버스로 지나가며 차 안에서 봤지만 우리 팀 모두 놀라움에 차마 핸드폰 카메라조차 들이댈 수도 없었다. 도시 번화가의 또 다른 양면성이다.
개스타운의 오랜 명물, 증기시계다.
순간, 체코의 인형극 시계 광장에 모여드는 관광객의 모습이 스쳤다. 이곳도 시간을 알려주는 그 이상으로 여행객들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우리도 차에서 내려 미리 자리를 잡고 12시가 되기를 기다려 본다. 12시가 되니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수증기와 함께 소리를 뿜어냈다.
붐붐붐~~12번,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감탄 박수다.
사나흘이 지나 패키지여행의 불편함이 슬슬 재미있어지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조합을 들여다보니 재밌다. 그중에는 한모녀도 끼어 있다. 갓 결혼한 딸과의 여행인 모녀커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꾸안꾸 스타일이다. 27년 옷쟁이 눈으로 척 보면 안다.
올케언니랑 온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서로 살펴주는 우리와는 달리 모녀커플은 엄마가 딸을 어찌나 살뜰하게 챙겨주는지, 밥 먹을 때도 딸의 식탁 수저까지 먼저 챙기고 반찬그릇도 딸 앞으로, 그저 꿀이 뚝뚝 흐르는 눈빛이었다.
여행 내내 그녀들은 기념품샵마다 꼭 들렀다가 약속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나타난다. 투어버스에도 마지막에 탑승할 정도로 관광보다 쇼핑에 더 진심이고 열심이었다. 탑승전 손에는 늘 쇼핑백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미안해하며 휴게소에서 산 간식 꺼리며 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얼굴에 띈 웃음 끼는 고급진데 순진하기까지 한 모녀였다.
매일 바뀌는 그녀들의 드레스코드와 헤어스타일이 우리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칠십 중반인 올케언니도 나름의 고상한 멋쟁이다. 그날 저녁에도 내일 입을 옷 얘기하다 말고 올케언니가 캐리어에서 모자하나를 꺼냈다.
"이거 고모 할래?"
"앗, 낮에 모녀가 쓰던 모자랑 같네?"
같은 게 아니라 닮았다는 걸 언니의 소녀스런 투정을 듣고 알았다.
그녀들이 쓴 모자는 명품, 헬렌 카민♡♡.
언니가 내민 모자는 짝퉁, ♡♡♡.
럭셔리한 언니 답지 않게 명품 앞에 소녀스런 반응은 의외였다. (울언니 절대 속물 아님)
덕분에 :::
내게 순간이동 된 그 짝퉁 모자는 여행 중에도,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도, 손주들 등ㆍ하원 때는 물론 나의 피크닉 1호 챙모자가 되어 있다. 내게 온 모자는 명품 그 이상이다.
'난 내가 명품이니까!' (착각은 자유다....)
달달했던 여행은 천천히 녹여먹는 법,
더디지만,
여행스토리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