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3.

구포

by 나철여

[오빠, 오늘 하루만 언니 좀 빌려줄래요?]


대학교수로 은퇴하고 삼시세끼 돌ㆍ밥ㆍ돌ㆍ밥은 물론 모든 취미생활도 부부가 한 몸처럼 지내고 있는 셋째 오빠에게 선희가 보낸 문자다.

올케언니도 몸이 안 귀찮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니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선희의 시선은 늘 같은자리에 머물고 있다. 결혼한 여자들의 일생은 거기서 거기.

점점 나이 들면서 내 한 몸도 귀찮은데 가족이라는 '굴레'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셋째 언니랑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무작정이지만 확실한 무 작전이다.


구포행 완행열차 무궁화호다. 추운 겨울 영하의 날씨조차도 반갑다. 둘을 서로 싸매 줄 이유가 생겼다.

시누이와 올케가 친구처럼 함께 떠날 수 있는 애정이 남아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선희는 5남 1녀 중 다섯 번째다. 위로 오빠가 넷이다. 바람 잘 날 없이 자란 어린 시절 선희는 말괄량이 가면을 쓰고 올케 언니들을 친언니처럼 맞들였고 식소굴에서 도망가고 싶어 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절대 놓지 않았다.


다른 오빠들과 달리 셋째 오빠는 국민학교 6학년때부터 동네 과외교사를 할 만큼 영재로 엄마의 자부심 중심에 있었다. ㆍ고등학교도 줄곧 장학생이었고, 서울대도 단번에 합격했다. 선희 아버지가 다니던 방직공장에서는 축하금과 함께 정문 위에 커다란 현수막도 걸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자존감을 높여주던 오빠도 늦게 사춘기를 겪듯 부모님을 가장 크게 실망시켰다. 데모 주동자로 퇴학, 군입대 후 지방대 K대 사회학과를 다시 들어가 무사히 졸업다. 또 다행히 사회학 교수로 은퇴했다. 지난했던 지난날들 속에 뾰족뾰족해진 오빠의 까탈성격은 무던한 올케언니를 힘들게 한다.


선희는 셋째 올케언니를 금손언니라 부른다. 뭐든 손만되면 돈이 되기도 하지만 식품영양과를 나왔으니 영양가 있는 요리로 무슨 요리든 척척 잘한다. 그중 제일 잘하는 건 오빠를 요리하는 거다. 별난 오빠를.


선희는 손언니랑 콧노래 부르며 콧바람 쐬러 간다.

간간이 내뱉는 한숨은 후렴구다.

부산 구포지는 한 시간 거리다. 요금도 경로우대를 받으니 3천 원대 라니...(살기 좋은 세상, 둘은 착하게 더 잘 살기로 다짐)... 청도_ 밀양_ 삼랑진_ 물금_칙칙폭폭 낙동강 줄기를 따라 달린다.


풍경을 담을 새도 없이 구포역에 도착,

큰길 건너 바다 같은 낙동강을 바라보며 부산 바람을 제대로 맛보기로 했다.

감동나룻길 리버워크, 금빛노을 브릿지, 화명생태 공원은 살아갈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냥 걷는다. 그냥 흐르는 거란다. 때가 찰 때까지 그냥.




"언니, 너무 좋지?"


"아이고, 숨이 탁 트인다!"


"우리 와인 한잔할까?"

"아니, 소맥 할래!"


술이라면 진절머리 치던 언니이고 선희다.

한잔이 한잔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형제의 난으로 이어지고 또 마무리는 올케언니들의 몫이었다.

첫째부터 원, 투, 포 오빠들에게는 엄친아 셋째가 늘 질투의 대상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폭발한다. 선희는 라운드 걸처럼 오빠들의 격투기 무대를 진정시키 끊어 주 심판원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툭딱대며 자란 선희는 일찍 결혼해 그 소굴에서 빠져나왔고, 아들 딸을 연년이 낳았다.

결혼한 지 45년이 지난 오늘은 81년생 아들의 생일이다. 아들은 아들 둘을 낳아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선희의 가슴이 오늘은 더 콩콩거린다.



일탈하는 두 여자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기뻤고, 재래시장도 그냥 스치지 못하니 천생 여자다.

두 여자의 눈은 생선에, 마음은 미더덕에 가있다.


"언니! 안돼, 우린 지금 여행 중이야!"

올케언니의 팔을 끌어당겨 팔짱을 꼈다.

"그럼 집으로 갈 때 사던가..."

언니는 그동안 셋째 오빠랑 자주 다녀 잘 알게 된 노포횟집으로 희를 안내하던 길이었다.


부산으로 시집가서 아들 딸을 부산에서 낳고 서울로 갔다가 다시 고향 대구로 온 선희는 3개 도시 중 부산을 가장 못 잊는다. 익숙한 땅내다. 회 먹는 것도 그때 배운 실력,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다.

주거니 받거니 소맥과 회를 먹다가 선희는 불현듯 스치는 부산 친구 옥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위, 급벙개다. 평소 선희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문자를 받은 옥화는 성당미사가 막 끝났다며 우리 위치를 물었다. 3호선 지하철 네 정거장째인 망미역에서 기다리겠다고 선뜻 약속했다.


옥화는 매사 긍정적이고 상대를 극진히 배려하지만, Yes, No 의사표시가 분명하다. 10여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한 후 완치, 더 밝고 건강해졌다.

까만 고급승용차가 망미역 2번 출구 앞에서 반짝반짝 기다리고 있다.

옥화는 김천이 고향이다. 그 억양으로 둘을 멋진 뷰가 있는 찻집으로 모시겠다며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격 없다.


"이거 무슨 냄새야, 술?"

"응, 보자마자 킁킁대냐!"

"회 먹을 땐 소맥 한잔 몰라?"

"잘 났어 정말, 미안하다!"


차문이 고급지게 닫히고 출발했다.


"가시나야! 내가 어디 여행 중이었음 어쩔 뻔했나 이렇게 무작정으로, 참 선희 너답다."

"왜, 또 자리 깔까? 척하면 척이지. 니깟 내 손바닥 안인 거 잊었나!"


뒷자리에서 웃음으로 지켜보던 올케언니를 향해 옥화는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어이쿠, 언니분은 첨 뵙는데 인사가 늦었네 죄송해요!

선희한테 많이 들었어요, 올케언니들 얘기."


셋째 올케언니는 손위지만 나이는 두 살 아래, 퉁치고 놀면 절친 저리 가라다. 언니 없이 자란 탓에 선희는 언니 많은 친구들이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부러움은 부끄러움도 모른다.


옥화가 주문한 소금빵과 작고 예쁜 케이크를 들고 테이블로 왔다. 커피 벨 울리기 전 찻집 차창밖 광안대교를 보며 부산바다를 부러워하는 언니의 시선도 금세 알아차리고, 멀리 보이는 센텀시티 건물들을 가리키면서 옥화가 선희 아들 안부를 묻는다.


"니 아들 저기 산다고 했지?"

"응, 그런데 대구로 온대."


"말? 잘됐네, 주말부부로 며느리 힘들다고 걱정하더니..."

"좋긴 한데 반반이지 뭐"


"빵 맛있네."


선희가 갑자기 말을 돌린 이유를 올케언니는 알 리 없 옥화는 모를 리 없다. 옥화의 유방암과 아들결혼 시기를 놓친 건 분명한 사유가 된다. 요즘 보기 드문 효자들이다.

그래도 아직 두 아들을 장가보내지 못 한 옥화에게는 '묻지 마'라는 금언이 붙어 있으니...


커피 벨이 울리고 셋은 커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부산 날씨도 제법 쌀쌀하지만 햇볕은 따사롭다.

바다윤슬이 반짝이고 노을이 물들기 시작, 각자의 폰에 담고 멋진 포즈를 취하고 서로 사진 찍어주며 자신만의 연출에 스스럼없다. 더 주름지기 전에 한컷이라도 남기고 싶은 건 셋 다 같은 마음이다. 더 늙기 전에.

선희랑 옥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주던 언니는 느새 여섯 시 반에 귀가할 기차표를 철도앱으로 끊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기차도 오빠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다.


셋은 헤어지고 다시 둘, 역으로 가는 길에 구포시장에 들렀다.

80년대 부산에서 살 적에 아구찜을 무척 좋아했던 선희다. 물에 젖은 생아구를 가방에 넣고 갈 자신이 없었다. 대신 미더덕 찜과 한창 제철인 물미역을 샀다.



어제는 낮술과 강바람 그리고 얼떨결에 만나 격 없는 수다까지 완행열차로 날려버렸으니 불면증도 도망갔는지 푹 자고 일어났다.

아침은 남편과 둘이 런두런 어제 이야기를 담아냈다. 아들생일을 맞아 미역국 대신 물미역무침으로, 아구찜 대신 미덕덕 찜으로 초간단 식탁을 차렸다.


"여보, 수고했어, "

"그러네요, 45년 전 당신은 첫 아빠가 되었고 나는 첫 엄마, 또 11년 전 첫 할미 할아비가 되어 지금까지 수고했요!"

♡♡♡


선희는 완행열차로 안전 행복을 누리고 있다. 곧 누리로로 교체될 무궁화호,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탓만 하진 않는다.

무궁화 열차에서 잠시 내렸지만 선희의 소설은 계속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선희는 낮은 톤으로 숨을 쉬고,

완행열차는 소리 없이 철길 위에 내려앉는다.

special / 무궁화호 _ by. 철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