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행연습

여행도 연습

by 나철여

시를 보면 시가 툭

에세이를 보면 에세이가 툭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극본이 툭

소설을 보면 소설이 툭툭 튀어나온다.


나 천재? 바보?

뭐든 다 쓴다고?


이것저것 심었는데 제대로 익은 건 하나도 없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내일도 있고 다음 달도 있지만 완치를 앞둔 암환자에게는 내일도 겸손해야 하고 내년도 불확실 하다. 벌써 9년 차에 접어든다.

내리막도 오르막도 숨 가쁘게 오르내리다 천천히 숨고르고 있으니 이제 선택의 무게는 훨씬 가벼워졌다.
지금, 오늘, 이번에 같이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늘 그랬.


남편은 같은 세대인데 가끔 세대차가 난다.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준다는) 신조어 물론 모르고, 눈치도 없. 선희에게만큼은 예외다. 식탁에 오를 반찬이 두렵기 때문일 수도... 낄끼빠빠도 가르치고 있다. 물 흐르듯이 끼빠빠. 아무튼,


벼르던 완행열차 4.

당일치기로 강릉 가는 동해안선 완행열차를 같이 가겠단다.

기어코 갈 거란다. 빠져 달라고 밀치면 밀칠수록 같이 가고 싶어 미치겠단다. 으면 애 된다더니, 아파서 그런가, 떼를 쓴다.

오랜 항암 후유증으로 짚게 된 지팡이만 빼면 그래도 멀쩡하게 봐줄 만한데... 지팡이 짚고 지하철역까지 버스 타고, 다시 동대구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데 가능하냐고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하나다.

그냥 투명인간처럼 그림자도 안 밟을 테니까 같이 가잔다.


껌딱지라면 떼 낼 수 있으련만...

갑시다. 같이!


지하철역까지 승용차로 가서 주차해 두면, 아침 첫 기차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탈 수 있다. 계획을 수정한다.


선희는 늘 공주이고 싶은데 백마 탄 왕자는 어딜 가고 선희 앞에 백마 탄 환자만 서있다. 남편과 팔짱은 기본, 보폭까지 맞춰야 한다.


'래, 그날만 내가 오로라가 되어주자.'


선희는 결단도 빠르다.

하필이면,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냐고.


'이 사랑도 통역되나요?'


태양에 절대 닿을 수 없는 지구가 자기장의 힘으로 태양의 아주 작은 프라즈마를 끌어들여 만든 빛이 오로라다.

이 찬란하고 황홀한 빛은 어쩌면 태양에 닿고 싶은 지구의 간절함이 그 작은 입자와의 충돌만으로도 태양에 닿았다.

착각하고 기뻐하는 찰나의 슬픈 망상 일지도 모른다.

_ 넷플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중에서.


그동안 희 혼자 완행열차1.2.3 놀이를 했다. 다녀오면 셀카 사진들을 들여다보 들려준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 보였나. 태양에 닿고 싶은 지구의 간절함이라면 또한 슬픈 여행이 아니길.


혹여라도 로맨틱 트립이 되면 어쩌나...(미리 짜 보는 각본)

그래도 각본대로 되면 좋겠다. 노년의 로맨틱 트립으로.


백마 탄 환자는 희랑 같이 가기 위해 투명인간 연습을 해야 한다.

선희공주도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 마음 비우는 거.

매일 밖으로 나가 혼자 걷던 산책길을, 둘이, 조금 더 빠르게 걷는 연습 중이다.


숙박비 0원 지하철 공짜 열차티켓 경로우대

돈 드는 건 아닌데, 같이 가긴 가는데, 언제 갈지는 아직 모른다.

날씨도 체크해야 하고 컨디션도 좋아야 한다.


지금껏 날씨천사는 항상 선희 편이었다. 결혼식 때에도 이사 때에도 큰일이 있을 때마다 일기예보 보다 더 날씨가 좋았다.

남편의 컨디션은 마음대로 안된다. 다만 미리미리 체크를 할 뿐이다. 여행을 위한 예행연습은 떠나는 날까지 이어진다.


더 바쁘다.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소설도 써야 한다.

매일 안 쓰는 일기도 써야 한다.

무사히 잘 다녀오면 진짜 기적을 쓰게 된다.


기적이라는 단어는 초긍정적이다.


'긍정적인 단어는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붙잡으니 마음이 편하다. 시작부터 발걸음이 가벼웠으면 좋겠다.

그리 되지 않을지라도 감사.

저녁이 오고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