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지키기
아들네는 부부교사다.
7년째 손주 둘을 주 중에 할미가 육아하는 중이다.
차로 30분 되는 거리에 있던 아들네 집을 매일 출근하 듯 다녔다. 아침 등원과 오후 하원을 시키고 며느리 퇴근 시간에 맞춰 나도 퇴근하듯 매일 루틴이 짜여 있었다.
그랬는데 작년 이맘때 주말부부가 되면서
아예 손자둘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옮기고 시부모인 우리들 집 가까이 바로 옆동으로 이사를 왔다.
같은 지하주차장으로 통한다. 편한 점이 너무 많다. 차도 아니고 걸어서 5분 거리, 춥거나 비 올 땐 지하통로를 이용하니 우산도 필요 없다. 불편했던 거리가 시간단축으로 편해지니 마음은 더 조심스럽다. 선 넘을까 봐.
시어머니는 평생 엄마가 될 수 없다고,
딸 같은 며느리지만 엄마 같은 시어머니는 한계가 있다고, 오빠보다 먼저 시집간 딸한테 이미 학습받았다.
적당한 거리 유지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몸이 가는 곳엔 마음도 눈도 따라간다. 안 보이던 게 보이고 못 느꼈던 부분도 공감되니 자꾸 더 신경이 쓰인다. 하자니 선을 넘고 안 하자니 마음 불편하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청소는 청소기가,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하지만, 넣고 빼고 정리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도운다는 건 그 자쳬가 프라이버시와 밀접해 있기 때문인 걸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퇴근할 때 파김치가 되어 오는 며느릴 보면 다 해주고 싶다. 손가락하나도 까딱하기 싫을 텐데 저녁식사 준비며 저녁 독박 육아까지 해야 한다. 주말부부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 아들만 둘이라 집안은 항상 정리 불가다. 뒤치다꺼리도 순식간이다.
소변기부터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얘들아 내일 봐"하며 현관을 나선다. "네 어머님 내일 봬요"
무심코 한 말 한마디도 신경 쓸까 봐 늘 신경 쓰인다.
'조만간 터놓고 얘기해야겠다.'
난 잔일도 돕고 싶다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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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얘기 하듯 말했다.
그리고 남 얘기 듣듯 들었다.
며느리의 대답은 예상대로
"괜찮습니다 어머님 감사해요" 했다.
7년 전부터 시아버지 암투병으로 보호자가 된 시어미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다.
가끔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도 마음 편치만은 않다.
편한데 조심스럽다.
끝까지 잘 맞추려면,
세대차, 환경차, 성격차, 자라 온 문화차이에서 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군더더기 없는 며느리의 성품은 한결같다.
한 해가 지나 손자들은 초1, 어린이집 원생이 되었다.
네 살 터울 인 두 손자에게 잔손 가는 일도 차이가 있다. 공평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데 너무 귀여운 네 살 손주에게 손이 더 많이 가고 웃음이 더 많이 간다. 미운 살 시작 된 초 1 손자에겐 눈치가 보인다. 서로 말투가 달라지고 웃음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선 넘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있다.
엄마의 교육방식과 할미의 손주사랑 방식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엄마는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할미는 노파심이 커진다.
며칠 전 휴대폰 대신 집에 인터넷 전화를 설치했다.
며느리는 오늘부터 출근, 동생 민주니는 어린이집,
초1 기준이는 학교 공사관계로 한달 늦게 방학, 개학도 한달 늦다.
엄마가 짜놓은 <스스로 할 일 하기> 프로젝트 1일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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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기준이가 혼자 집에 있다.
아침엔 동생 민준이 어린이집 등원도 함께 해주고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라며 시크하게 집으로 올라갔다.
뒷모습만 봐도 든든한 울 손주다.
할미는 할부지 아침밥 준비까지도 흥이 난다.
밥을 먹으며 신세대 며늘님의 교육방식을 칭찬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첫 시도라 가만히 생각하니 아직 어린데 혼자 집에 있는 게 대견키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응가하나?'..
또 했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 차려입고 건너 가보니
집엔 아무도 없고
거실 책상에 할 일 체크리스트를 보니
거의 체크된 상태다.
집을 나와보니 현관 앞에 있던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안심.
그런데 또 노파심, 찾아 나섰다.
'이렇게 체감온도가 영하 10도까지 내려가고 바람까지 부는데...'
'혹 자전거 타다 넘어지거나...'
또 부질없는 불안이 스며들 즈음,
저쪽 너구리 놀이터 쪽에서 오는 자전거 한대가 쌩~하고 기린 놀이터 쪽으로 지나간다. 기준이였다.
한참 숨어 지켜보다가 들켰다.
"어 할머니 어디 가요?"
"으응,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가던 중인데 넌 이렇게 추운 날 자전거 타는 거야?
엄마도 알고 있어?"
"네! 한 15분 됐을걸요"
하며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렇구나... 그래 더 탈 거야?"
망설이는 기준이 대답이 나오기 전
먼저 쐐기를 박았다.
"지금 니 얼굴은 빨갛다 못해 시퍼렇게 얼었네, 장갑도 안 끼고 어서 들어가 감기 들라."
"네,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또 시크하게 현관 안으로 들어가는 기준이를 보고 할미는 안도의 숨을 쉬고 도서관으로 갔다.
오는 길에
전화를 했다.
"할머니 책 반납하고 집에 가는 길인데 뭐 필요한 거 없어?
지금 뭐 해?
티브이 소리도 안 나는데 심심하면 할머니 갈까?"
하니
"할머니 원래 소리 안 나는 만화(라바)가 있어서 그걸 보고 있어요. 안 와도 돼요"
한다.
(아침에 뭘 잘못 건드렸는지 티브이가 소리는 안 나오고 자막이 떴었다.)
"그래, 그럼 필요한 거 있음 전화하고 시간맞춰 학원가라."
뻔 한데 궁금하다.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노파심 끊고 믿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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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는 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미생 만화를 보고 있었다.
(엊그제 할미 육아일기 끄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