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 난초
구녕 이효범
연구실 창문을 닫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열었다.
동물원에 끌려온 동물처럼
난초가 빼꼼히 쳐다본다.
너는 보았을 것이다.
내가 아침에 늦게 와서
연거푸 하품만 하다가
무엇인가 끄적 끄적거리다가
길게 히히덕거리며 컴퓨터에 몰두하다가
한낮에 연구실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배가 남산만큼 불러 들어와서는
두 의자를 붙여놓고 다리 뻗어 실컷 자다가
문득 깨어나서 거피나 타먹고
원숭이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먼지 낀 철학책을 건성으로 넘기다가
귀신에 쫓기 듯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모자를 쓰는 모습을.
이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너처럼 피아노 소리의 잎새와
적막한 숲 옹달샘의 향기가 있다면
먼 곳에 사는 오랜 친구들을 부를 수 있겠다.
여기 창문을 열어 두었으니
별도 달도 보이지 않고
돌처럼 무겁게 침묵하는 책들 속에서
한 가닥 바람으로나마 위안을 삼아라.
홀로 살며 연구실을 지키는 나의 난초여
어디 화려한 꽃까지 바랄 수 있으랴.
푸른 잎새만이라도 늘 보여 다오.
후기:
퇴직하고 연구공간을 마련하니 축하한다고 제자가 난을 보내왔습니다. 난을 받으면 나는 불안합니다. 내가 얼마나 이 난을 기를 수 있을까. 아무리 게으른 자도 난을 기를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난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습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다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微物도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면서 소우주인 사람을 대하는 것은 참으로 벅찬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아내와 자식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적은 3인칭의 사람은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어떤 때는 전혀 감정의 동요 없이 통계로 처리할 수 있지만, 2인칭의 당신은 사랑의 연인이면서 증오의 원수가 됩니다. 그 중에서 친구들은 우정이 식으면 떠날 수 있지만, 평생을 함께 사는 가족은 무엇인가 관계가 어긋나도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어, 매일 걱정과 고뇌의 대상이 됩니다.
머리가 희니 암말들을 거느리던 種馬의 위용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멀리 한 구석에 조용히 웅크리고 오랫동안 때를 기다려온 糟糠之妻가 눈을 부릅뜨고 나타났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힘이 있을 때는 어림없던 요구들을 고생한 아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또 가정의 평화를 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하나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들은 한 번도 적절한 선에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요구가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가령 ‘오늘 설거지 당번은 당신이에요’ 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아침밥도 안 먹고 조용히 연구실로 향합니다. 거기 가서 맹렬하게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연구할 주제는 있지만 언제나 머리속에서 맴돌 뿐, 지금 이 나이에 연구비 주는 곳도 없고, 평가를 하여 퇴직 연봉에 반영하는 것도 아니라서, 한없이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같은 아내를 피해 남의 눈치도 안 보고 혼자 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가뜩이나 요즈음은 코로나로 사람 만나는 것이 걱정인데, 컴퓨터에서 비대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퇴직하고 가장 잘한 일은,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도망갈 수 있는 나의 굴을 만든 大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