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차 내려온 지방의 어느 콘도. 초저녁부터 하늘은 속이 답답한 듯 먹먹하더니, 기어이 젖은 행주를 짜내듯 굵은 물줄기들을 쏟아냈다.
흡연구역의 공기는 눅눅하고 맛이 없다. 몇 걸음 옮기니 가로등과 난간이 나타난다. 그 아래로 펼쳐진 잔디밭. 비에 젖은 풀과 흙의 냄새가 서늘하게 코끝을 쓸어준다. 여기라면 좋겠다. 꽁초만 챙겨 다시 몇 걸음 옮기면 되니까.
난간에 기대어 소리 없는 저녁 비의 관람객이 되기로 했다. 바람 한 점 없어 빗줄기는 허공에 팽팽한 수직선을 긋고 있었다.
새끼손가락보다 짧아진 담배의 붉은 끝은 작은 총알의 탄두 같았다. 모닥불처럼 잠잠하다가 들숨과 함께 지지직 타오르며 ‘발사해 줘’라고 말하는 듯.
마지막 순간까지 제 몸을 태워 한결같은 빛과 열을 뿜어낸다. 얼마 남지 않는 순간까지 타협이란 없다. 일관되게 맹렬한 저 불꽃.
빗속의 불꽃을 넋 놓고 감상하는데, 갑자기 뭔가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저 보통탄의 붉은 탄두만 어둠 속 잔디밭으로 날려 보내면 어떨까. 팽팽한 수직선 중 하나에 걸려서 공중에서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꽁초도 아니고 불씨만 날리는데 우중의 불이 옮겨 붙는다는 것은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다. 분명 땅에 닿기도 전에 차가운 빗방울 하나에 부딪혀 한 줌 연기로 사라질 것이다.
검지로 끄트머리를 툭, 쳐내면 붉은 점은 1, 2초 정도 우아한 수평의 포물선을 그리다 이내 중력에 순응할 것이다.
그 찰나의 비행 동안, 저 작은 불꽃은 과연 몇 개의 빗줄기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
저 녀석에게도 운이란 것이 있는 것인가. 수평으로 날던 붉은 탄두는 용케도 빗줄기들을 피해 갔다. 하지만 곧이어 시작될 수직의 긴 낙하. 그 시간 동안에는 더 빽빽한 빗줄기의 포위망을 피할 수 없으리라. 공중에서의 소멸은 예정된 결말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 붉은 탄두는 외부의 힘이 사라지자 오롯이 중력에만 순응하며 제 궤도에 올라탔고, 온전히 제 모습을 지키며 내려앉았다. 그렇게 바닥에서 조용히, 마지막 빛을 발산한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순수한 불꽃으로 사라졌다.
진한 한줄기 연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축축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숨을 내쉬자,
허연 냉기들만 공중으로 흩어진다.
흔들리는 어깨, 축축한 채로 미끄러지는 손.
라이터 불꽃은 담배 끝에 닿을 듯 말 듯 맴돌다,
사라진다.
불씨들은 세상의 비를 맞기도 전에,
서로의 방향과 부딪히며 제 안에서 먼저 사그라들고 있었다.
수직선들은 계속 그려지는데,
난간에서 떠나기가 어렵다.
이미 오래전에,
얼어버린 것 같은
불씨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