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러야 나온다

by lightjc

꽉 막혀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어딘가에 버려지는 건가. 아니면 여기서 썩어 가는 건가. 누가 구해 주려나. 며칠 동안 퇴사기념으로 부모님 찾아뵙고, 친구들 만나고, 카카오톡 프로필엔 “퇴사만세! 열흘간 잠수”라고 써 놨는데, 그렇다고 아무도 연락을 안 하진 않겠지? 우유나 요구르트 배달이라도 시킬 걸 그랬나. 자취하는 원룸 앞에 잔뜩 쌓인 우유를 보면 사람들이 빨리 신고해 줄 텐데……


한동안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바닥에 부드러운 꾸러미가 만져졌다. 성인용 기저귀 몇 개. 역겨움에 던져 버리려다 바닥에 깔고 앉으니 푹신한 방석 같은 느낌이다. 뒤로 누우니 다리를 위로 뻗을 수도 있는 게 통 안은 생각보다 넓고 따뜻했다. 위쪽에 있는 작은 관을 빨자 막걸리가 나왔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공기도 들어오는 듯했다. 엄마 뱃속에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잠시 어이없는 생각도 들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바로 앉으니, 위쪽에 자물쇠 하나가 만져진다. 그래, 번호만 맞추면 된다. 할 수 있다. 근데, 와인통 휴가라고 해야 하나? 이대로 며칠 멍 때리는 것도 퇴사휴가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생각인가.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온몸이 나른해진다.


빨리 나가야 되는데, 나가야 되는데……자물쇠를 만지면서도 눈앞의 광경에 자꾸만 눈과 귀가 쏠린다. 유리로 덮인 주먹 만한 틈새 사이로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막걸리통 5개가 있고 그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사람 같다. 나보고 지켜보라는 건가. 시험을 앞두고 시리즈 마무리를 앞둔 TV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 * *



“씨발, 이게 뭐야…에퉤퉤… 뭔 막걸리가 나와”

김세전이 손 앞의 펌프를 누르는 순간 백색불이 반짝이며 막걸리가 얼굴에 튄다.


“막걸리?”

“악!”

앉은 채로 잠들었던 진형세가 갑자기 일어나다 막걸리통 뚜껑에 머리를 부딪힌다. 꾸부정한 자세로 정수리를 만지던 그는 이내 허리 쪽에 있는 펌프를 눌러본다. 찍! 시큼한 액체가 튀어 오르며 짙은 회색 불빛이 반짝인다. 입술을 다물고 힘들게 침을 삼킨 그는 펌프질을 해 본다. 한번 누를 때마다 회색 빛이 반짝거리며 튀어 오르는 막걸리를 받아먹는 그의 모습이 비친다. 점점 펌프질 속도가 빨라지는데 진형세의 얼굴에 웃음기가 그려지는 듯하다.


다른 사람들도 허리 쪽 손잡이를 누르자 차례대로 불빛이 반짝이며 막걸리가 튀어나온다. 순식간에 왼쪽부터 금빛, 보라, 파랑, 백색, 회색 5개의 불빛이 켜지며 흰색 액체가 계속 솟아오른다. 갈증과 허기에 지친 주양직, 차영치, 최상견, 김세전, 진형세……이들의 입과 배를 막걸리가 채우고 적셔준다. 적막하던 지하실, 반짝거리는 5개의 기계들이 요란하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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