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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내미 이 복 희 Apr 12. 2024

땅콩 까는 남자/이복희

땅콩 까는 남자


이복희


흙의 뿌리들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한 소쿠리 땅콩을 앞에 두고 등 구부린 중년남자, 동물의 왕국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긴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는 딱, 딱, 딱, 리듬에 맞춰 손가락을 놀린다

나무 그늘에 늘어져 있는 수사자
측은한 눈빛으로 남자를 내다본다

남자는 신문지에 땅콩을 수북이 까놓고, 방바닥의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곁눈질한다 잠깐씩 눈을 감고 포효하는 밀림의 왕인 양 입을 벌린다

4050세대 된바람에 휩쓸린 남자

목덜미 늘어뜨린 수사자가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 남자를 덮칠 것 같다 노란 땅콩꽃이 형광등 불빛에 파르르 떤다

땅에 맞닿듯 허리 굽힌 암사자, 가젤 목덜미를 물고 클로즈업된다 새끼 사자들이 앞다투어 풀숲을 헤치고 나온다

언덕 위의 수사자, 지평선에 저무는 노을빛을 바라본다


-2024년 계간 [사이펀] 봄호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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