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부서에 가면 좋은 것들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후 거의 7-8년이 된 시점에 드디어 마케팅에 1년짜리 파견프로그램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마케팅에 지원할 때 여러 가지 면접 질문들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체력이 좋냐는 질문이었다. 맨날 전략 타령하는 마케팅 부서에서 면접 질문을 체력이라니. 좀 웃긴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마케팅은 지루한 반복 업무와 야근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영업과는 다르게 활동비도 없어지고 인센티브도 줄어든다. 영업에서 마케팅으로 옮기게 되면 초반에는 경제적인 부분에 손해가 꽤 크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케팅에 가려고 했는지, 그리고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를 하면 무엇이 좋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회사원인 우리는 월급을 받고 그에 따른 합당한 시간과 노력을 회사에 제공하는 것이 기본이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아니겠는가.
1. 배움의 기회 (시장을 볼 수 있는 눈)
마케팅 부서에서는 일단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소위 시장 전체를 보는 넓은 눈을 갖게 된다. 기존에 내 지역 내에서의 경쟁에 집중하고, 회사에서 내려준 프로그램과 메시지만을 활용했다면 이제는 어디서, 어떤 메시지와 프로그램을 어떤 전략으로 적용할지에 대해서도 폭넓게 알게 된다.
처음에는 6개월짜리 단기 플랜에서 1년으로, 또 3년으로 그리고 10년까지 단, 장기 계획을 짤 수 있는 능력과 시야를 갖게 된다.
일단 새로운 업무를 하다 보면 굉장히 즐겁다. (마케팅으로 업무 전환을 하면서까지 온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걸 배워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영업사원들이 마케팅에 와서 처음 느끼는 즐거움은 조금 웃기지만 본인이 스스로 만든 브로셔가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을 때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처럼 일종의 자기계발 강박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곳이다.
2. MS Office (파워포인트, 엑셀), 영어
지금은 초중고 대학교 때부터 MS Office를 워낙 많이 활용하고, 또 영어는 심지어 영어유치원을 통해서 배우기 시작하기도 한다. 사실 초등학교인 내 아이도 최소한 영어 발음과 읽는 속도는 나보다 훨씬 낫다. 그나마 단어나 문법 등에서 내가 아직은 더 낫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다. 특히 R과 L, J 나 Z 발음과 같이 한국인이 내기 어려운 발음을 낼 때 나를 비웃는데 열이 받기도 하면서 참으로 지금 아이들은 풍요롭고 기회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영업에서는 사실 슬라이드를 만들일이 많지는 않았다. 당연히 스킬이 좋지 않았고, 처음 마케팅 부서에 가서 만들었던 슬라이드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부끄러웠고 부끄러움을 원동력 삼아 열심히 만드는 연습을 했다. 엑셀은 두말할 나위 없이 더 심했다. 영업부에서 함수를 얼마나 썼겠는가.
낮에는 주어진 일들을 마치느라 정신이 없었고, 뭔가 발전하기 위한 시간은 저녁때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근도 많았고, 당연히 면접에서 체력에 대한 질문을 하는 이유도 이런 부분 때문이다. 손목터널증후군이나 허리, 목 디스크도 흔히 걸리는 고질병들이었다.
새로 입사하는 혹은 주니어 마케터들에게 난 처음에는 100의 시간동안 할 수 있는 100의 일을 준다. 그런데 숙련도가 올라가고 요령도 붙으면 100이 아닌 70,80의 시간 동안 100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나머지 20-30을 조금 더 상위의 복잡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을 준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조금씩 더 발전 가능성이 있는 일을 주게 된다. 그래도 내가 당시에는 매니저가 참 끝도 없이 일을 준다고 생각했다. 뭔가 조금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정말 딱 죽기 전까지만 조절해서 추가로 일을 주는 것 같아서 화도 많이 났었다.
3. 네트워킹
대한민국은 아직도 사람에 의해 많이 움직이는 사회다. 그리고 영업직을 제외한 모든 부서는 본사에 있다. 허가 부서, 급여, 의학부 등과 쌓아놓은 건설적인 관계들은 향후 무엇을 하든 나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조금 더 운이 좋다면 떠오르는 rising star들과 함께 일하며 옆에서 배울 수 있는 경험도 있을 수 있고, 높으신 분의 눈에 들어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사실 거의 없지만)
마케팅 부서를 위해 내근으로 갔지만 생각 외로 다른 부서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인사부나 교육부, 의학부, 허가, 급여 등 회사에는 다양한 부서가 있고 내 적성에 맞는 곳은 어디든 될 수 있다. 난 참고로 지금 임원이 안 되었다면 인사부에 지원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부서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같은 문제에 대해 부서에 따라 다른 관점이 무엇인지. 다른 업무 스타일 등 조금만 관심을 두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또한 업무뿐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각자의 다른 가치관이나 의외의 부분을 발견했을 때도 그렇다. 특히 가치관은 굉장히 중요한데 비록 회사에서 동료로 만났지만 혹시라도 퇴사 이후에도 친구로도 지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직을 몇 번 하다 보면 어딘가서 또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인데 굉장히 반갑고 동질감이 느껴진다.
4. 승진의 기회
영업사원에서 마케팅으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이제 전략적인 사고와 논리력, 시장을 넓게 보는 인사이트, 내부 presence 등 여러 가지 영업 때와는 다른 영역의 능력이 필요로 된다. 영업에서 지점장으로 그리고 National Sales Manager 같은 영업부 총괄자리에 오를 수는 있으나, 거기까지가 대부분의 한계점이다. 영업 하나의 커리어 만으로 임원의 자리에 가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올라갈수록 특히 다국적회사의 경우 본사와의 소통이나 여러 복잡한 문제에 대한 시나리오 분석 등 ‘내근’적인 부분이 강조되는 데 영업만으로는 이러한 부분을 커버하기 어렵다. 지금 내 자리의 잠재적 후임자를 정해야 하는데도 영업을 아무리 잘해도 영업 경력만을 갖고 있는 사람을 후임자로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듯이 말이다.
특히나 영업부 출신들이 처음 마케팅에 갔을 때 전략적인 부분에 대한 챌린지를 많이 받는데 그걸 이겨내고 나면 많이 발전된 나를 볼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현재 커머셜 부서의 수장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내근직을 거친 사람이고, 거의 90% 이상 마케팅 출신이다. 따라서 위로 높이 가겠다는 야망이 있다면 힘들어도 마케팅직을 꼭 가봐야 한다. 나 또한 전체 경력 중에서 영업보다 마케팅 경력이 더 많아졌다.
5. 외부의 다른 시선
정말 유치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영업직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업직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 말이다. 직업의 귀천은 없고,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영업직이 훨씬 나은 부분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던 그 시절에는 마케팅이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여서 좋았었다. 참 나도 인격적으로 철없던 시절이다.
6. 이직의 기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케팅은 이직이 쉽다. 물론 영업직도 이직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숙련도가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고, 나이가 어느 정도 이상 들게 되면 시장에 인정해 주는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최근 경력직 영업사원을 뽑을 때도 30대 초중반을 가장 선호한다. 40대가 되면 정말 엄청난 하이퍼포머가 아니라면 거의 이직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경력직 마케팅은 자리가 많고 이 직고 굉장히 빈번하다. 이직에 한 번 성공할 때마다 연봉이 15-20% 씩 올라가니 본인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곳이라면 안 갈 이유가 별로 없다. 물론 이직이라는 것이 꼭 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있는데 안 가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난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운이 좋았기에 1년간의 파견을 마치고 영업으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다시 마케팅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공석이 생겨서 지원했고 파견기간 동안 좋게 봤던 매니저께서 무난히 팀에 합류를 동의했다. 지금도 참으로 고마운 분이고 가끔 학회장에서 보거나 하면 반갑다.
배우는 것도 많고 힘들었지만 동시에 즐겁게 마케터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사에 온 지 딱 3년이 되는 해에 나는 또 한 번의 이직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