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이직 혹은 실패한 이직
3년 정도 지난 후였다. 지금은 더욱 자주 벌어지지만 당시에도 회사에서 조직개편이 있었다.
난 몇 년간 같은 질환군의 제품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영업 7년+마케팅 3년, 총 10년간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내가 맡고 있는 제품이 다른 조직으로 이관된다는 발표가 났고, 나 또한 해당 팀으로 팀을 옮겨야 했다.
비슷한 제품을 10년간이나 하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는데 즐겁게 일하던 팀에서도 나 홀로 옮겨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꽤나 열이 받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제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있던 상황이 꽤나 불만스러웠던 상황이었기에 울고 싶은데 빰때려준 격이었다.
때마침 함께 일하던 차장님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지인이 모 다국적회사의 사장이어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고 나에게까지 기회가 오게 되었다.
기본급을 20% 넘게 올렸고 타이틀도 좋았다만, 회사도 소위 빅파마라고 하는 메이저회사에서 조금 규모가 작은 곳으로 갔고, 집이 멀어져서 힘든 부분도 있었으며, 이전 회사와는 다르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급은 올라갔으나 하는 일은 오히려 허드렛일들이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새로운 회사와 사람들, 제품 그리고 일들로 재미를 느끼며 열심히 하기도 했다. 의욕 있게 생각했던 MBA 도 야간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원래는 해외로 가고 싶었으나 역시나 문제는 ‘돈‘이었다. 2년짜리 코스의 학비만 연간 1억이 넘었고, 거기에 생활비까지 하면 거의 2억이었다. 추가로 내가 직장을 그만둬야 했으니 거기에 해당하는 기회비용까지 생각하면 거의 4억에 육박하는 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하고 왔을 때 그만큼의 돈을 과연 뽑아낼 수 있을까? 에 대한 의구심이었던 것 같다.
한 때 해외 대학 출신자들을 우대하며 많이 채용했던 적이 있었으나 그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버티지 못했고 대부분이 2-3년 내에 퇴사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 대학 소지자에 대한 프리미엄은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과거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했던 것이 국내 SKY에서 운영하는 야간 MBA 대학원이었다. 낮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벌고 저녁에는 수업을 들으며 2년간 학위를 따는 코스였다.
동시에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 기존 회사에서 너무 업무 강도가 높았던 탓인지 잘 생기지 않았던 아이가 때마침 우리에게 왔다.
하나씩 생각해 보면 모두 좋은 일이고 신나는 일이었으나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회사를 다니며 대학원을 다니며 와이프를 케어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특히나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초기에 이런 많은 것을 동시에 하려다 보니 시간과 노력에 한계가 있었다.
당시 그 새로운 회사는 전반적으로 비즈니스가 좋지 못하여 계속해서 인원을 줄여가는 구조조정이 있었는데 분위기까지 어수선하다 보니 퇴사자들도 자주 있었고 아무래도 안정감 있게 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를 채용했던 매니저가 그 와중에 퇴사를 하고, 새로운 매니저가 왔다. 정말 똑똑하고 전략적인 분이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고 잦은 충돌이 있었다. (충돌이라고 해봤자 일방적이었지만) 여러 정신없는 상황에서 계속 일방적인 상황이 이어졌고 나는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다니고 있던 MBA 동기들은 나의 얼굴이 나날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많은 걱정을 해줬고, 나 또한 오래 지속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회사의 비즈니스는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이었고 나의 상황 또한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와이프가 아이를 출산하고 가질 수 있는 3일간의 휴가도 다 채우지 못하고 회사에 나가야 했다. 앞에서 한 번 얘기했지만 꼭 알고 지내야 하는 사람 중에 변호사가 있다. 향후에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아마도 전문직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적절히 처리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 또 한 번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다. Asia-pacific region 도 공중분해가 될 정도로 큰 변화였고 당연히 한국 지사의 내가 다니던 부서도 영향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매출 50억 원의 조직, 하지만 신제품을 통한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갖는 조직이었지만, 당장 현금 흐름이 중요한 구조조정 앞에서는 미래의 스토리는 의미가 없었다.
마케팅은 나 한 명에 추가로 1명에 대한 채용을 끝내서 새로 온 분은 입사한 지 겨우 3개월 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마케팅 부서의 인원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이라는 목표가 내려왔다.
2n +11의 조건. 즉 2에 근속연수를 곱하고 거기에 11개월치의 급여를 더 주는 조건이었다.
난 당시에 1년 하고도 10개월 정도 근무했을 때였고, 2x 2년 + 11개월치 = 즉 15개월치 월급이었다.
매니저는 저녁에 나에게 의사를 물어봤고, 와이프와 상의를 했다. 나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흔쾌히 관두라고 했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면담을 통해 퇴사 의사를 밝혔다. 매니저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두 가지의 복잡한 마음이 나를 감쌌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1년 치 연봉이 넘는 돈까지 받으니 기분 좋음이 하나요, 또 하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회사에서 의미가 없던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 ERP (Early RetirementPlan) 패키지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감정을 느끼리라. 그래서 구조조정 및 퇴사 과정에 있어서 상대방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수년간 일해왔던 직장을 그만두는데 괜히 원한(?)을 갖고 퇴사하게 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까지 딱히 뭔가를 더 해주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라도 감싸주려는 진정성이 필요하다.
그렇게 결국 첫 이직은 성공했으나 2년도 다니지 못하고 퇴사를 했으니 결론적으로는 실패한 이직인 것 같다.
하지만 실패, 성공적인 이직인지 아닌 지를 떠나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다음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정말 중요하다.
1. 나의 능력과 회사의 기대치
난 지금도 작은 회사로 이직할 때는 가려는 회사의 내부 사정을 잘 확인해 보라고 얘기한다. 작은 회사에서는 큰 회사의 직원에게 높은 연봉과 높은 직급을 제시하며 데려간다. 왜일까? 물론 큰 회사에서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생각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시스템의 부재를 사람으로 커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작은 회사는 제대로 된 내부 규정이나 시스템이 있기 힘들다. 아주 작은 예를 하나 들자면, 내가 짧게 다녔던 회사는 회사 인트라넷으로 이것저것 임시방편으로 갖다 쓰다 보니 회사에서 사용하는 시스템들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들이 다 달랐다. 거의 6-7개 정도의 다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사용했고 당연히 시스템 간의 연동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엉망인 상황을 회사에서는 경력자의 노하우와 능력으로 커버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큰 회사에서는 당연히 충족되던 것들이 작은 회사에 가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시스템 하에서 일했던 나 같은 (상대적인) 주니어 마케터는 변화한 환경에 충분히 빠르게 적응하고 회사에서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2.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하지 말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간과 노력은 한계는 존재한다. 아무리 우선순위를 둔다고 해도 인간의 한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직과 MBA와 큰 가정사의 변화가 한꺼번에 오지 않도록 가능하면 조절하는 것이 현명하다.
3. 매니저 운도 복이다. 스타일에 맞춰야 한다.
이직했던 회사에서 날 채용했던 분은 참으로 똑똑하고 나이스한 여성분이었다. 가끔 담배도 피우시고 술도 드시는 거의 남자같이 호탕한 성격의 분이었다. 지금 만약 다시 만난다면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시자고 했으리라.
그 이후에 힘들었던 분은 똑같이 똑똑한 분이셨지만 차갑고 전략적인 분이었다.
두 분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고, 업무 하는 스타일이 정반대였다. 난 개인적으로는 마이크로 매니지를 하는 분보다는 나를 믿고 맡기는 분과의 케미가 좋은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매니저를 골라서 일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매니저에 따라 나의 일하는 방식도 조금 더 유연하게 맞춰야 할 것이리라. 이 부분이 참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이직을 할 때 연봉을 많이 올려주는 이유는 그만큼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업무, 새로운 제품, 새로운 조직.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공채로 입사했던 회사에서는 실수를 덮어주기도 하지만 일단 이직을 한 이후는 난 돈에 팔려온 ‘용병‘이고 용병은 돈에 걸맞은 실적을 보여야 한다.
돈을 많이 준다는 건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이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쉽게 느낄 수 있다. 어딜 가든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
이렇게 세 번째 이직을 실패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