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일 때 꿈꾸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난 공부를 잘하던 학생은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초등학교 때는 곧잘 점수가 나왔던 걸 보면 아마도 머리는 그럭저럭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소위 말하는 공부머리보다는 잔머리가 발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좋아하는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정말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사춘기가 오면서 방황도 하고, 하고 싶은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모든 것을 두루두루 잘해야 하는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 시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어가던 성적이 졸업할 때는 반에서 30등 정도 했으니 안 봐도 뻔하지 않았을까.
소소하게 사고는 쳤어도 완전히 빗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대입수능 준비를 위해 한창 성적이 좋아야 할 고등학교 때도 역시나 바닥을 기었다. 위에 3살 차이 나는 공부 잘하던 형님이 대학에 가는 것을 보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뒤늦게 철이 들어 공부를 기초가 없으니 시작했지만 따라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고등학교 2,3 학년에 정말 죽어라고 공부해서 대략 지방의 국립대, 서울의 사립대 중 일부는 갈 수 있는 성적이 됐다.
당시에는 경영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 취업이 되는 시기였고, 나도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방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래도 학비가 쌌던 소위 지거국이라고 하는 광역시 소재 국립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 서울에 있는 학교들은 학기당 300-400만 원씩 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지방 국립대의 장점인 80-100만 원 사이의 학비를 내고 다녔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공부하러 (정확히는 너무 영어를 못해서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작은 아들의 바람을 들어주셨다. 그곳에서의 1년은 나에게는 참으로 인생에 있어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시간이었다.
다행히 지인 분 중에 여행사에 다니는 분이 계셔서 가격도 가장 저렴(?)하고, 한국 사람이 최대한 없는 곳을 찾아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대로 말도 못 하는 곳에서 무슨 배짱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만큼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와 절실함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 3학년때 처음 본 토익 시험 점수가 겨우 600점 초반이었으니... 취업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던 것 같다.
도착한 곳은 캐나다의 동쪽 끝 중에 끝에 있는 도시였다. 밴쿠버에서 한 번 갈아타고 토론토에서 또 한 번 갈아타서 도착한 깡시골이었다. 한국인이 전 도시에 학생들을 포함해서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 식당, 상점은 하나도 없었고,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힘든 1년이었지만 그런 환경 덕에 성공적인 어학연수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영어 점수라는 측면에서는 그랬다.
난 처음에는 정유회사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히 연봉이 높아서였다. 외벌이 교육 공무원 집안이라,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가족을 부양해 오신 부모님께는 정말 감사하지만 안타깝게도 생활에 여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직장을 얻을 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돈이었다.
취업을 준비하던 2000년대 초반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여전히 기름장사가 회계사나 변호사 등의 전문직을 제외하고는 돈을 많이 주는 곳들 중 하나이다.
당시에 지원했던 GS 칼텍스는 학벌을 많이 보는 것으로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그리고 삼성테크윈에 지원했다.
삼성테크윈을 지원할 때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에피소드가 있었다. 서류를 통과하고 임원 면접을 보는 자리였다. 임원 서너 분들이 앉아 계시고 그 자리 앞에 책상 하나를 두고 일대 다의 면접을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다가 실수로 책상 위에 있던 물컵을 쓰러뜨려 물이 쏟아져 버렸다. 그런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서 휴지를 주섬주섬 꺼내서 책상을 싹 닦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면접을 진행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돌하게 그 자리에서 원래 지원했던 인사부가 아니라 마케팅 부서로 변경해서 지원하고 싶다고 얘기까지 했다. 당시만 해도 카메라시장의 성장성이 컸기 때문에 시장을 공부하고 나니 마케팅으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취업 준비생이 면접을 보다가 물을 엎지르는 사고를 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사실 삼성에 지원함과 동시에 다국적 제약회사인 L사에 영업직으로 지원을 했었고, 이미 합격 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실수를 해서 만약 떨어지더라도 이미 붙어있는 L사에 가면 되니 큰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삼성에서도 좋게 봤었던 것 같다. 심지어 겁도 없이 면접에 들어와서 부서를 마케팅으로 옮기고 싶다는 녀석을 말이다. 그리고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도 물론 쉽지 않겠지만,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갖는 것이 과도할 정도로 겸손함(?)으 보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합격한 두 회사 중 나의 선택은 어디였을까?
난 다국적 제약회사인 L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당시 삼성의 인사부 담당자가 전화하여 대체 어딜 합격했길래 대한민국에서 삼성에 입사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지방 국립대라는 그저 그런 학벌에 평균 B 정도였던 학점에 그나마 조금 높았던 토익점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점이 없는 매우 평범한 지원자였기에 더욱 의아해하셨던 것 같다.
그럼 왜 삼성에 가지 않았을지에 대해 궁금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그래도 비만약이 워낙 이슈이다 보니 좀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만 해도 제약회사 특히 다국적회사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다국적제약회사는 물론 3D라는 오명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당시에도 알짜배기 회사였다. 지금도 종종 리베이트나 술접대 등이 기사화되기도 하지만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다국적회사들은 워낙 내부 규정이 강력해서 과도한 접대와 불법적인 판촉활동은 강하게 금지되어 있다. 적발되면 거의 해고당하기 때문에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하지는 않는 이유도 있다. 결국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므로..
일단 L사는 연봉이 높았다. 당시에 삼성이 신입사원들에게 약 2400만 원의 연봉을 제시했는데, L사 에서는 2600 만원 대의 연봉을 줬다. 영업부는 하루에 활동비라고 불리는 수당도 존재했다. 적게는 2~3만 원에서 회사에 따라 많게는 5만을 넘게 준다. 영업사원 중에 원래는 활동에 사용하라고 주는 이 돈을 생활비나 용돈으로 쓰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당시에 일비로 적금을 들어서 얼마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다가 내부에서 징계를 당한 사람도 있다는 얘길 들었다. 원칙적으로 일비(활동비)는 말 그대로 영업활동을 위해 지급되는 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말이나 여름에 휴가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삼성이었지만 당시 주변에 알아보니 업무 강도가 너무 높아 평균 근속연수가 수년에 불가했고 언감생심 휴가는, 특히 좀 긴 연휴를 쉬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런 정보는 운이 좋게도 지인 중에 또 다른 다국적제약회사인 M사 에 다니는 분이 있어서 제약회사의 보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가 있었다. 역시 사람이 힘이다.
그리고 어릴 때 개차반으로 살다가 나름 뒤늦게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뜬 지라, 직장생활을 몇 년 해서 돈과 경력을 쌓고 해외 MBA를 가고 싶었다. 당시에는 워낙 해외 MBA에 대한 사회적인 기대치가 높았고, 또한 당시 마침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친형의 영향도 있었다. 지금도 부모님 댁에 가면 당시에 열심히 보면서 꿈을 키웠던 해외 MBA에 대한 책들이 꽤 있다. 미국의 유수 학교들에 대한 비교자료, GMAT, TOEFL 등 많이 정리했지만 여전히 책장에 꽂혀 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 수도 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는 삼성이라는 한국 회사보다는 미국회사를 더 인정해 줄 것 같았고, 유학비용을 벌기 위해서는 동일한 시간을 근무해도 급여가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수많은 정보들이 인터넷에 있고, 어떤 기준으로 어떤 회사를 선택해야 하는지 또 어떤 것들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지 등에 해서 알아보기가 쉽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러한 정보는 지방까지는 많이 오지 않았었다. 결국 처음 직업을 선택할 때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가족, 혹은 주변의 친구, 지인, 선후배 등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의 젊은 친구들은 본인만의 길을 좀 더 일찍부터 고민하고 준비해 가는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참으로 단순하고 속물적인 이유로 제약회사로의 입사를 선택했다.
만약 지금도 삼성그룹의 마케팅 부서와 제약회사 영업직 중 제약회사로의 입사를 선택한다면 아마 비슷한 얘기를 들을 것 같다. 당시 부모님과 친구들은 나의 선택을 적극 만류했다. 왜 영업에 가서 힘들게 일하냐고 말렸지만 나도 나름의 목표가 있었기에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 공부를 하러 가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했기에 결국 돈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지금도 회사에 다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돈이다.
또한 L사는신제품을 론치 하기 위해 대규모로 사람을 뽑았고 나름 인센티브도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연말까지 목표를 달성하면 3000만 원을 준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퇴사 후에 알고 보니 뭐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큼을 다 받은 직원은 없었다고 들었다. 역시 회사는 회사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까지도 진행형인 21년에 달하는 여정을 시작하는 첫 직장으로 제약회사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