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게 얻은 2번째 29살
나는 서른이다. 아니, 서른이었다.
1995년에 돼지띠를 두르고 태어난 나는 두 번째 29세 청년의 삶을 살고 있다. 나라에서 공짜로 시간을 되돌려 준 덕분이다. 2023년 6월 28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식 나이를 없애고 나이 셈을 만 나이로 통일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래서 나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 나이 유급을 당했다.
별 다른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서른이라는 나이가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거니와 백세인생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예전과 같은 임팩트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자투리 20대를 한 번 더 보내고 있고 이제 정말 서른 살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유급당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30이라는 숫자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이렇게 2번 더 살면 90살이잖아?'
이었고 그제야 서른이 인생에 있어서 주는 무게감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내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정말 살아진 대로 살아온,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노력이 현저히 부족했던 청년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곧 서른이라는데, 예전이라면 진즉 아이가 있는 아빠의 삶을 살고 있을 나이라는데, 이렇게 2번 더 살면 90살이라는데 나는 그동안 무얼 했는가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지근지근 밟고 지나갔다. '뭘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니?'
그래. 서른이 되면 멋있게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줄 알았다. 전문가. 내가 일하는 분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멋있게 남들 앞에서 내 일을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음과 동시에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왁스 바른 머리를 찰랑 흔들며 자신 있게 워킹하는 삶을 살 줄 알았다. 실상은 아직도 사회 초년생 티를 벗지 못하고 어리숙한 표정을 줄곧 짓는 조그마한 회사의 직원으로 살고 있다.
그래도 남들과는 다른 특색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다가 한 가지 떠올리게 되었다.
'해외생활 찍먹 전문가'
짧은 여행으로는 유럽을 일주했고 모로코에서 7개월, 싱가포르에서 2년 남짓 그리고 베트남에서 1년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내가 눈에 들어왔다. 여행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서 일을 해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삶에 대해 느끼는 바가 남들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각 나라에 대해 대단한 통찰력이 있을 만큼 오랜 기간 지낸 것이 아니라서 '찍먹' 전문가로 나 자신을 칭하기로 했다.
서른을 눈앞에 둔 찍먹 전문가로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남들과는 조금은 달라졌을 삶을 대하는 방식과 내가 겪어온 경험들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생각들을 한 데 모은 비빔밥 같은 글을 써보기로 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살아오며 느낀 건 결국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온전한 나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100년 인생동안 내가 누군지 모르고 지낸다는 건 너무 슬프고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솥비빔밥이 될지, 놋쇠 그릇에 담긴 전주비빔밥이 될지, 고기라곤 들어가지 않은 산채비빔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메뉴판에 모든 종류의 비빔밥을 가지고 있는, 언제든지 들러도 포근하고 배부른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