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탈
서른.
주변에는 서른이 되었어도 아무 느낌 없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고 다녔다. 속사정은 그게 아니었는지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서른에 대해 느낀 나의 감정을 줄기차게 적어댔다.
줄기차게 적어댄 만큼 서른이 되면서 느낀 자세한 감정은 건너뛰고, 베트남에 주재원으로 파견되어 있을 당시 어느 휴일이었다. 5월 즈음으로 기억한다. 해가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생각을 문득 하게 됐다. 이대로 2번만 더 살면 90살. 죽음.
무슨 용기에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슬슬 퇴사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작했던 작업은 '그럼 뭐 할래?'에 답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 한편에 처박혀있던 꿈들을 일렬종대로 모아 세우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땐 가로로 쓰는 것이 편하니 일렬횡대로 세워보겠다.
작곡가, 유튜버, 작가, 그리고 이탈리아 시골에 노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일하며 살기
한 번 꿈을 정리해 보자 마음먹으니 내가 내린 선택에 나중에라도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아 졌다. 예를 들어 '좋은 카메라가 있었더라면 유튜버로 성공했을지도 몰라.'나 '더 좋은 작곡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기가 막힌 노래를 썼을지도 몰라.' 같은.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후원자가 되어 꿈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부족함 없이 다 사줬는데 안 한다고? 그럼 너는 탈락이야.
1번 후보 - 작곡가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지라 왜인지 자신이 있었다.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가 죽기 전 자작곡 10곡을 넣어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기도 하고. 공부를 조금만 하면 노래를 공장처럼 찍어내리라는 희망과 함께 필요한 모든 것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애플 작곡프로그램을 구매하고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미디 키보드 그리고 드럼 비트를 찍는 런치패드를 한국에 잠시 들어갔을 때 모조리 사 왔다. 그러나 만든 곡은 0곡. 탈락
2번 후보 - 유튜버
셀프 출연이 아니라 '세계테마기행'이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처럼 여행 다큐와 사소한 브이로그를 결합한 영상을 만들면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고프로를 구매하고 3만 원짜리 프리미어프로를 구독했다. 또 고프로 배터리가 금방 나갈까 봐 보조 배터리 겸용 손잡이도 구매하고 사운드도 혹시나 안 좋을까 봐 수음에 좋다고 하는 마이크도 구매했다. 그러나 올린 영상은 달랑 2개. 편집에 손도 안 댄 영상은 10개. 탈락.
3번 후보 - 작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이 먼지 털기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것이 브런치였다. 운이 좋았던 건지 한 번에 작가가 되었고 '오, 나 감 좀 있나 보네?' 하는 건방진 마음으로 시작한 글쓰기였다. 다른 꿈들에 비해 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나에겐 노트북이라는 최적의 도구가 있었으니. 그러나 퇴사를 하기 직전까지 쓴 글은 고작 3개. 탈락.
4번 후보 - 이탈리아 시골에 노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일하며 살기
이건... 탈락.
허무함.
꿈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손에 직접 부정당했을 때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간결하면서도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찍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길게는 10년 동안 간직해 왔던, 지금 걷는 길과는 다른 저 먼 곳에 아름답게 머물고 있던 꿈들이 막상 들여다보니 내 꿈이 아니었다니. 나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뭐 할래?'
다시금 질문으로 돌아왔을 땐 8월이 되어있었다. 그 이후로도 아쉬운 마음에 이미 탈락한 꿈들을 만지작거렸지만 나는 그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 길은 진정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이미 더워진 날씨에 에어컨 밑 소파에 누워 또 한 번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그때였다. 생각 없이 틀어두었던 유튜브 영상이 끝나자 떠 있는 하나의 추천 영상.
'미국 항공유학 비용 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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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