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한 쉐도우 복싱

헛둘헛둘!

by 에드니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해군사관학교에 가면 파일럿을 할 수 있대.'



잘못된 정보다. 파일럿을 하려면 공군사관학교에 가야 한다. 그럼에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리고 믿고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공부를 조금 더 했으면 큰일 났을 거다. 다행히 탈락했다. 방향은 알았어도 방법은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던 그때, 그리고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던 줄 알았던 나는 파일럿이란 꿈을 놓았었다.


꿈에 먼지를 터는 과정에서 내가 예전부터 비행기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적었던 적이 있다. 남들은 닌텐도를 살 때 나는 조이스틱으로 비행기 날리기를 좋아했고, 인터넷을 한참 뒤져가면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속 거대한 비행기를 자동 착륙 시키는 걸 성공하곤 했으며, 문득 관제사가 궁금해져 관제하는 게임을 찾아 하다가 비행기를 여러 대 부딪히게 만들기도 했다는 글.


하지만 그 글에 대한 결론은 비행기는 해외에 나가기 위한 수단일 뿐 내가 진정 원하는 건 외국에 사는 거라는 식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이미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인 양 스스로를 포장했다. 그러나 유튜브 추천 영상에 뜬 '미국 항공유학 비용 총 정리'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건 거짓된 결론이었다는 것을. 그저 먼 꿈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 정신승리였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후 3시쯤 그 영상을 발견하고 정신이 들었을 땐 밤 11시였다. 하루 종일 영상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그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가 봤다. 나와 같이 과거의 꿈에 미련이 남아 찾아온 사람들, 꿈을 위해 한 발씩 내딛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이 비행이라는 토픽에 대해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연하다는 듯 글을 남겨놓고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이런 걸 어떻게 진짜 하고 있는 거지? - 개멋있다.

나도 하고 싶다. 이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고 싶다. 내 사고는 거기서 멈췄다. 그날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러나 정작 퇴사를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엔 한 달이란 시간이 더 걸렸다. 내 고질병. 선천적 남 눈치 증후군 때문이었다.




퇴사를 하고 싶은 이유는 회사가 싫어서,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어디 처박혀 먼지가 케케묵은 꿈을 다시 찾아냈고 그걸 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함께 걸어온 시간들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을 약속해 온 그 말들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가족한테 말을 꺼내는 것도 무서웠다. 이 자식은 이제 자리 좀 잡아 묵묵히 회사 다니면 그래도 적당히 살 수 있을 텐데 또 무슨 서른이 넘어서 머나먼 타지에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는 걸까. 언제 철 들어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란고. 내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아들로서 부모에게 인생 재시작을 선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인생의 관성을 이겨내는 것도 한 인간으로서도 쉽지 않았다. 그냥 좀 더 살아봐. 지금 그냥 일에 치여서 퇴사하고 싶은 걸 거야. 나는 끊임없이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싸워야 했다. 어쩌면 저 말이 맞지 않을까? 서른이라는 나이가 아직 스스로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지 않을까? 남들이 보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고 하지 않을까? 저 집 부모는 자식이 저렇게 철이 없어서 어떡해.


닥쳐. 시끄러워. 한참을 나 자신과 싸워대던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고함쳤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 수도 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한 톨도 안 되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고 대기권에 빌붙어 겨우 숨 쉬며 살아가는 우리는 삶에 대한 대단한 노력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꿈을 어떻게든 이루고 싶었다. 10월 초쯤 면담을 통해 나는 퇴사를 알렸고 12월 7일, 프린터에서 내 사직원이 출력되었다.


또한 우려하던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직장 동료들은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냐는 농담과 함께 꿈 찾아간다는데 뭐라 하겠냐며 나를 유쾌하게 보내주었고 가족들 역시 걱정은 했지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야지 어떡하겠냐며 나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를 옭아매려고 하던 또 다른 나 자신은 그 뒤로는 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혼자 쉐도우 복싱을 한 꼴이 되었고 나는 치열한 복싱경기에서 다행히 승리했다.


이제 나는 마음 편하게 다음 스텝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비행이 안되니까 3월쯤 미국으로 나가면 되겠다. 숙소는 이쯤 잡고, 학교는 여기로 하면 되겠지? 오. 좋네. 그러다가 친하게 지내던 부장님 한 분이 카톡을 보내셨다.


'미국 간다며? 응원한다. 근데 트럼프 당선되기 전에 빨리 비자 신청해. 니 그러다 못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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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설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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