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하지만 항상 새삼스러운
공포 그리고 멘붕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첫 비행을 뒤로하고 비행을 계속 하자 여전히 무섭고 땀은 비 오듯 흘렀지만 그 회를 거듭할수록 비행기는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배워야 할 비행기 기동이 늘어날수록 비행 자체에 대한 공포는 교관이 보여주는 기동을 왜 나는 똑같이 해낼 수 없는지에 대한 답답함으로 바뀌어갔다.
비행에 점점 적응되자 공항까지 걸어가는 길에 느꼈던 긴장감도 덜해지고 다른 학생들의 착륙 역시 첫날처럼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로부터 나름의 배울 점을 캐치해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행에만 오롯이 집중하던 어느 날, 공항을 가는 길에 갑자기 눈에 들어온 건 캐나다 국기. 빨간 단풍이 가운데 선명하게 그려진 그 깃발만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캐나다에 도착하고 3일 후에 비행을 시작한 뒤, 거의 매일같이 비행했기에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적응할 시간이 없었을 법도 했다.
‘그래, 여긴 캐나다지?’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공항까지 터덜터덜 걸어가던 와중 문득 스친 생각.
‘근데 적응이라고 할 게 있었나?‘
캐나다 살이를 1주일쯤 했을 무렵, 하우스 메이트가 캐나다에 와보니 어떤지 소감을 물었다.
‘사계절이 있는 싱가포르 같아요.’ 대답했다.
다양한 인종들, 다양한 음식, 싱가포르와 비슷하게 생긴 버스와 지상철. 역 주변으로 형성된 조그마한 쇼핑몰들. 주거단지 내에선 찾아보기 힘든 식당과 가게들.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이미 전에 와 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기시감. 버스를 내릴 때엔 줄을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 말곤 딱히 새롭게 적응할 필요가 없었다.
외식은 비싸고 배달비는 더더욱 엄두가 나질 않으니 식사는 직접 해결했다. 장을 보고 들어와 저녁을 해 먹고, 다음 날 먹을 양이 남으면 잘 소분하고, 파와 같이 자주 쓰는 재료들은 손질해 놓고, 비슷한 양념이나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 돌려 막기.
모로코에서 일할 때 했던 방식이었다. 퇴근 후 Acima라는 마트에 들러서 꾸역꾸역 아시안 식자재를 찾아 장바구니에 들쳐 맨 뒤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던 기억. 닭갈비를 해먹은 다음 날엔 닭볶음탕을 해 먹었고, 애호박찌개를 해 먹은 다음 날엔 애호박 전을 부쳐먹었던 기억.
한국과 같이 밖에서 술 한 잔 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천문학적인 지갑의 출혈이 생기는 지라 주류 샵에 들러 저렴한 와인을 사들고 와 하우스메이트들에게 한 잔을 권한다던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집에서 혼자 온전한 시간을 보낼 수 없을 때엔 딱히 할 게 없더라도 스타벅스에 들러 내가 즐겨 듣는 유튜브 뮤직 리스트를 정리하거나 해야 할 일을 글로 적어보는 것.
이런 일들 역시 싱가포르에서 소주가 2만 원이나 하는 비싼 물가와 베트남에서의 놀 거리 부족을 겪은 뒤 혼자 잘 노는 법을 시도해 보고 터득한 덕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철없을 적 멋 모르고 했던 그 경험들이 지금 내가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걸어갈 때 알게 모르게 나를 받쳐주는 것.
쓸데없는 경험이란 말은 없다고들 한다. 나도 그건 항상 느껴왔던 말이다. 뭘 배우고 있는지 모를 것 같은 순간이 지나고 나중에 돌고 돌아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던 적도 많고, 전혀 다른 분야로 이직을 했기에 쓰이지 않을 것 같던 경험들이 필연적으로 필요해지던 때도 많이 겪었다.
그런데 삶의 방식까지 그런 경험들이 스며들어 아무렇지 않게 새 나라에 적응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준다는 것은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나이는 몰라도 경험은 허투루 쌓이는 게 정말 아닌 모양이다. 어찌 됐든 감사하게도 캐나다에 쉽게 적응했다.
해외로 매번 나가서 그렇게 생활하고 경험하는 것이 자신들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근데 해외 생활이 대단한 건 전혀 없다. 한국에서 더 치열하고 더 힘들게 그리고 더 뜨겁게 살아가는 분들이 훨씬 많고 난 단지 그쪽으로 경험이 쌓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내가 쌓아온 경력이 부합한다는 사실에는 매우 감사하게 되었다.
뒤늦은 도전에 경험이라는 미약한 부스터를 달게 된 나는 이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뒤로하고 비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비행은 내가 개척해보지 않은 미지의 분야다. 모르는 것도 많고 '경험'이 없기에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돌고 돌아 뒤늦게나마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고 인생에 녹아들 경험임을 알기에 나는 그저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다.
'언젠간 인천공항에 착륙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