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kg과 5kg 사이
비행기를 타고 김장김치가 왔다.
자그마치 5kg.
푸슈슉
작은 공간에서 버틴 시간만큼 가스가 빠진다.
오는 동안 작은 박스 안에서
버텨낸 양념들과 야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뚜껑을 여니
딱 그 폭싹 익은 김치의 김치 냄새가 난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법한
한국에서 온, 딱 바로 그 김치.
우체국 사전접수를 해달라기에
2000g으로 신고를 했다.
내가 생각한 사랑의 양이 2kg였던가
내가 원하던 사랑의 양이 2kg였던가
도착한 건 4980g
거의 5kg의 김치.
자취하던 시절
뭐가 많이 들어가지도, 오래 둘 수도 없던
시원찮고 작은 냉장고에
엄마가 내밀어 마지못해 가져온
반찬을 밀어 넣고
결국엔 먹지도 못하고 쉬어버린 반찬을
버려내야 할 때면
그게 그렇게 귀찮고 짜증이 났다.
씻어내야 하는 반찬통에
씻어내지지 않는 물든 얼룩들처럼
엄마를 향한 내 짜증은
씻어낸 척해도 내 얼굴에 계속
은은하게 묻어있었다.
아기를 키우는 동안은
엄마가 주는 반찬이 꼭
일방통행을 역행하는 사랑의 질주처럼
불편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한 만큼이 아니야
엄마의 사랑은 언제나 모자라진 않았지만
딱 내가 원하던 시기에 원하던 모습으로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보다 더 멋진 사람이고 싶었고
어쩌면 그 흔한 말처럼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이미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태어났는데
그 자체가 이미 나인데
내가 어떻게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정의한 어른으로서의 모습이
그저 우리 부모와 다른 그 무엇일 뿐이라면,
그게 내 기준의 전부라면,
내 시야는 얼마나 좁아지는 것인지.
역설적이게도
엄마, 아빠와 닮은 나를 인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다.
나는
조금은 엄마처럼 살고
조금은 엄마처럼 살지 않는다.
엄마의 모습이 보이는 내가 싫지 않다.
우리 엄마가 어설픈 사람이긴 했어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다.
또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을 느끼도록 낳아줘서
밥 굶지 않도록 돌봐주어서
나름대로 인생을 고군분투하며 살아주어서
그것대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서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한 반찬을 만드는
그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 시간,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내가 원하던 건 아니었지만
그것밖에 줄 수 없던 그 사람의 인생을 헤아린다.
건강 걱정이 사랑이었던 사람.
밥을 챙기는 것이 사랑의 의무였던 사람.
하지만 긴 세월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너지지 않고 살아낸 사람.
냄새를 타고 사랑이 왔다.
김치 냄새 내 고향의 냄새.
그립진 않았더라도 어쩐지 반가운 그 냄새.
나중에 많이 그리워질 그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