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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Aug 02. 2021

누군가에게서 온 책

김기림의 <길>


 친구와 나는 한 달에 한 번 미술관에 간다.

지난 5월에는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한 <미술과 문학이 만났을 때>에 다녀왔다. 1930년대와 40년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이 문학과 미술을 주고받은 흔적을 되살린 전시였다. 당시 신문의 삽화, 문인과 화가들의 교류한 흔적, 제본이나 출판문화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였다. 문인들이 남긴 그림, 화가들이 남긴 그림과 글,  시, 서, 화를 고루 갖춘  당시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예술가들이 주고받은 엽서, 시화, 방명록 같은 것들까지 볼거리가 많았다.


 당시 시화 화문이 실린 글들이 보기 좋게 한 장씩 인쇄하여 읽을 수 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친구와 나는 스탠드가 설치된 그곳에 앉아, 백석의 <나타샤와 당나귀>, 김기림의 <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시를 좋아하는 친구는 화문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전시에 다녀오고 나서 도록을 샀다. 개인 소장인데다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고 전시에서 다 보지 못한 것들을 더 자세히 보고 싶기도 했다.  제일 먼저 <길>을 펼쳤다. 그 글은 1936년 조광 2권 제3호에 실린 글이다. 세로 쓰기로 된 3포인트 정도 작은 글씨로 된 그 시화다. 김기림의 글에 장석표가 그림을 그렸다. 고목이 있는 돌아가는 길. 전신주가 서 있고 눈이 묻은 길에는 인적이 없다. 고요한 길은 구불구불 돌아가고 나목 몇 그루가 떨고 서 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지나는 풍경이다.    

        

나의 소년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길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도라갔다. 내의 첫사랑도 그 길 우헤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푸른 한울을 때 없이 그 길을 너머 강가로 내려갔다. 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저져서 도라왔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히와 함께 여러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나려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아렸다.
할아버지도 언제는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도라오지 않는 어머니, 도라오지 않는 계집애, 도라오지 않는 이야기가 도라올것만처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여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딱 여기까지만 실려 있었다. 나는 이 글이 좋았다. 도록 사진 옆에다 시를 옮겨 썼다. 그렇게 옮겨 놓고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왜 나는 이제서 이 시를 알까. 알고 보니 수필이었다. 뒤에 이어지는 글이 너무나 궁금했다. 검색해도 글이 없어서 책을 검색했더니 품절이었다. 다행히도 중고가 있어서 주문했다. 가격 1000원, 배송비 2500원.


 이삼일 후, 택배가 왔다. 초코파이 상자였다. 웬 초코파이? 얼른 상자를 풀었다. 김기림의 <길> 그 책이었다. 깊은샘 출판사에서 1992년 9월에 낸 책이었다. 그해 우리 딸이 태어났고 9월이면 막 짚고 일어나 걸으려는 때였다. 1992년 10월에 3쇄 발행이라고 되어 있었다. 한 달 만에 3쇄를 찍었다니. 그 인기가 대단했나 보다.


시 수필 시론이라고 되어 있고 김기림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뒷면에는 김기림의 사진이 실려 있고 '이상이 가장 흠모한 언어의 마술사'라는 표사가 실렸다. 그 아래 ‘김기림 그를 생각하면 해방 뒤 민족의 비극과 혼란에 휩싸여 허접쓰레기 속에 묻혀 들어가 잃어버린 구슬 같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시인 이상노가 적었다. 뒷장을 넘겼더니 둥그리고 활달한 한문 글씨체로 사인이 되어 있었다. 처음 책을 산 주인일터다.

  

 책을 넘겼다. 책날개에 김기림의 동경 유학 시절 젊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1908년 함북 학성에서 태어나 1930년 일본 대학 문학예술과를 거쳐 동북제대 영문화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발표를 시작하였다...’는 작가 소개가 있었다. 그의 사진 몇 장도 실려 있었다. 아기들과 찍은 가족사진, 신석정과 찍은 사진. 최정희, 노천명, 김동환, 이헌구, 김억 같은 문우들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어진 책머리에 눈이 멈췄다.


“세환이 보아라”

 -해금 소식을 듣고 미국에 살고 있는 김기림 선생의 누님이 시인의 장남 김세환 씨에게 편지를 보내오셨다.-고 부제가 달려 있었다.


 사형수가 38년 동안 재심에 재심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은 것보다 비정했던 세대를 응시하면서 첫발을 디뎠을 적에 하늘도 땅도 울어주지 않았겠느냐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는 절절했다. 한 살 위 누님으로 누구보다 기림을 잘 알았던 그는 2년 동안 동경에서 유학을 같이 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기림을 안타까워했으며, 기림이 ‘코 풀 종이에도 글을 썼다’는 말, 김기림의 책을 송지영이 1천만 원에 팔아 주었다는 말, (1950년대 그 정도였으면 지금으로 얼마만 가치일까.) 그의 해금 소식을 들은 김기림의 누님이 보내온 편지 속에는 진한 눈물이 배어 있었다.


 다른 작품을 읽기 전에 <> 먼저 찾았다.   장의 . 그게 전부였다.   뒤에  다른 길이 이어질  알았는데 거기서 길이 끝나고 말았다. 마치 내가 북으로 끌려가며  이상 건널  없는  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작품을 다시 읽었다. 신문에 원래 실렸던 글과는 차이가 있었다. 1992 맞춤법으로 다시 옮긴 글이었다. 발표할 당시 원문이 훨씬  진실하게 다가왔다. 빨간 펜으로 물결선이 행마다 그어져 있고 동그라미로 크게 쳐져 있었다.  책을 읽었던 주인도  작품이 좋았던 것이다.  책은 이런 맛이 있다. 누군가와 같이 읽는 듯한 느낌. 그책을 읽었을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온도를 경험하는 느낌.


내게 온 책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김기림의 글을 만날 수 없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납북되기도 하고 스스로 가기도 했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금지되었다. 그들은 순수한 예술을 하던 새로운 사상에 이끌린 피 끓는 청년들이었다. 김기림은 1988년에야 해금되면서 비로소 우리 문학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38년 동안 북으로 간 작가라는 미명 아래 단 한 편의 시도 남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왔다....

어느새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이 얼룩을 씻어 준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기림. 조약돌처럼 주웠다가 잃어버린 첫사랑. 강가에서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온 그. 그 길을 따라 떠난 어머니와 첫사랑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리는 그.


 그 슬픔이 너무도 진하게 긴 길만큼이나 돌아온다. 내 얼굴에 바닷바람이 슬픔의 냄새를 싣고 오는 것처럼. 시 였다. ‘조약돌처럼 주웠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햇빛이 내리는 강가에서 반짝이는 조약돌을 주워 주머니에 폭 간직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귀엽고 이뻐서 주운 조약돌, 바지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다 어딘가 잃어버리고 만 조약돌. 첫사랑은 그런 것인가.

               

좋은 글을 읽고 나니 마음이 가득해졌다. 여러 번 입속에서 소리 내어 굴리다 보니 다 외우고 말았다.


집에 있을 수 없어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나도 강가로 가야 했다. 강가에 가서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 돌아오고 싶어서. 그러면 어둠이 기어와 얼굴의 얼룩을 씻어줄 것만 같아서.



김기림 글, 장석표 그림, <춘교칠제-길>,조광 제2권 3호.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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