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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Sep 17. 2021

나만의 공간, 소귀

 글 쓰는 공간에 대하여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다지. 글 쓰는 사람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자기만의 방이란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인 공간을 포함한 말이다. 심리적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공간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작가들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공간이 있다. 오직 책상 하나만 있는 극도로 절제된 방에서 쓰기도 하고,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카페에 가서 쓰기도 하고, 마당 끝에 작업실이나 다락방에서 쓰기도 한다.


타니아 슐리의 《글 쓰는 여자의 공간》은 제인 오스틴부터, 실비아 플라스, 니콜 크라우스까지 서른다섯 명의 여성 작가들의 글 쓰는 공간에 대해 쓴 책이다.



 그들은 부엌에서도 쓰고 식탁에서도 썼다. 방구석이나 침대에서도 썼다. 화려하고 넓은 곳에서 글을 쓰는 이도 있었고, 온통 어질러진 곳이나 아주 작은 공간에서 쓰는 작가도 있었다. 그곳에는 담배나 차 한 잔, 연인의 사진, 고양이가 있기도 했고,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물건을 옆에 두고 글을 쓴 카렌 블릭센, 설거지를 할 때가 좋은 구상이 떠오르는 최적의 시간이었다는 애거사 크리스티, 집 근처 카페에서 매일 정해진 세 시간 동안 글을 썼다는 나탈리 사로트는, 에펠탑이 보이는 근사한 집에서도 커튼을 치고 프루스트처럼 완전히 외부를 차단한 채 글을 썼다. 언제건 아무데서나 글을 쓴 작가도 있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손때 묻은 공간에서 글을 썼다. 늘 쓰던 공간이 익숙한 것이다. 남편이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쓰던 때가 좋았다고, 박완서는 글에서 쓴 적이 있다. 어떤 공간에 있든 중요한 것은 좋은 글을 쓰는 일이다.

 

 조용한 농가. 멀리 숲으로 둘러싼 강이나 호수가 보이면 더욱 좋겠지. 하늘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있는 방. 부드러운 바람에 조금씩 배를 불리듯 날리는 흰 새틴 커튼이 있는 방. 초록 잎사귀가 풍성한 화분과 질그릇 연필꽂이와 몇 권의 책을 올려놓은 커다란 나무 책상이 있는 방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산책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을 보고,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농부를 바라보기도 하고. 그런 곳에서 글을 쓰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데 제인 오스틴이 썼다는 책상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바람이 일었다. 12각형으로 꽃잎처럼 펼쳐진 상판에 외다리로 된 작은 호두나무 탁자. 겨우 종이와 잉크 정도 놓을 수 있는 크기였다. 식탁 다섯 개와 의자 스물여덟 개, 벽난로가 두 개나 있는 집이었지만, 오스틴은 창가에 놓인 다탁 같은, 그 작은 책상에서 글을 썼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초턴의 풍경까지는 가질 수 없지만, 그런 책상이 갖고 싶어졌다. 부드러운 나뭇결을 가진 책상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오스틴이 살던 집과 오스틴의 책상



 아침마다 한두 시간 글을 쓴 지 2년이 넘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글쓰기는 이어졌다. 어디든 글 쓰는 공간이 되었다. 어딘가로 떠날 때는, 탑승시간을 기다리면서 쓰고, 비행기 안에서 쓰고, 기차에서도 썼다. 여행지에서는 침대에 기대어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때로는 이국의 카페에서도 글을 썼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면 낯선 풍광이 흘러가고 있었다. 헤밍웨이도 ‘초고는 걸레’라고 하였다는데 내 글이야 말해 무엇하랴. 보잘것없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썼다.


 자주 가는 동네 카페에서 쓰기도 했다. 그곳에도 내 자리가 있다. 카페 창밖으로 수수꽃다리가 햇살에 빛나는 곳이다. 꽃이 필 무렵이면 그윽한 향기가 카페 안으로 흘러오곤 했다. 좋아하는 꽃향기를 맡으며 커피 한 잔과 함께 글을 쓰던 그 시간이 간절해진다.  


불현듯 닥쳐온 전염의 시대는 우리를 방구석에 묶어 놓았고, 역설적이게도 습관을 만들기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일상은 단순하게 반복되었다. 오전에 글을 쓰고, 살림을 하고, 오후에 산책을 하고 책을 읽었다.  



 책상이 있는 내 방이 있지만, 아침마다 노트북을 여는 곳은 소파 귀퉁이다. 이름하여 소귀. 넓은 팔걸이에는 요즘 읽는 책들이 쌓아져 있다. 아기가 처음 가진 물건에 애착이 생기듯 나도 소파 귀퉁이에 애착이 딱 붙고 말았다. 옴폭 꺼진 소파 귀퉁이. 나는 거기가 좋다.


 얼마 전 소파에서 쓰는 앙증맞은 책상이 생겼다. 가구를 만드는 지인에게 호두나무 탁자를 선물 받았다. 가로 세로 5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노트북과 책 한 권 그리고 차 한 잔 올려놓을 수 있는 크기다. ‘ㄷ’ 자 다리를 소파 밑으로 쏙 집어넣을 수 있고, 쓰지 않을 때는 날개를 접을 수도 있다. 뜻밖의 선물. 사용자의 입장을 고심해서 만든 그분의 노고가 고마워진다. 오스틴의 그것처럼 외다리에 나팔꽃 모양의 고상한 탁자는 아니지만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올려놓고 일하기 딱 좋은, 귀여운 탁자다. 소파와 함께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나만의 글쓰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특별한 책상까지 생겼으니 이제 좋은 글을  일만 남았다. 노트북을 올려놓기 전에 천천히 쓸어내린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나무의 살결이 만져진다. 자판을 누르는 손끝이 통통해진다. 왠지 내가 《글 쓰는 여자의 공간》 속의 작가가  기분이다. 이제 나에게 ‘글신 내려 그들처럼  일만 남았다. 가당찮은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오늘도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쓴다. 여덟 시간 동안 연주되는 베토벤 소나타를 낮게 틀어놓고, 푹신한 쿠션을 등에 대고, 새로 생긴 책상에서 글을 쓴다. 문득 고개를 들면 거실 창으로 하늘이 들어온다. 멀리 한강 한 조각도 보이고 막 잠에서 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린다.


내가 좋아하는 곳, 소귀所歸.

글을 기다리는 시간이 고여 있는,

진부한 말이 스러지고 뭇 생각이 자라나는,

자기장처럼 바깥으로 번지던 문장들이

내 안으로 옴폭 깊어지는 자리다.


그곳은, 글로 귀의하는 자리다.




<2021 에세이문학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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