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소낭
제주의 소나무는 애국가에 나오는 육지의 소나무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보존 가치가 크다. 특히 해송은 자태가 귀여우면서도 우아하다. 산천단에 있는 500년이 넘는 곰솔은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나무로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제주에서는 나무를 ‘낭’이라고 부른다.
소나무는 소낭, 팽나무는 폭낭, 구실잣잠나무는 조밤낭… 바람 많은 제주에서는 효과적으로 말을 전달하려는 습성 때문에 축약된 말이 많다.
몇 년 전부터 제주의 소낭은 엄청난 시련을 맞고 있다. 재선충으로 씨가 말라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나무는 한 번 베어지면 다시 돋아나지 않는다. 제주도에 소나무재선충병이 발생한 이후 2004년 이후 2024년 현재 255만여 그루의 소나무를 베어냈다고 한다. 또 얼마나 많은 소나무가 붉게 변하는 병에 걸려 베어질지 모른다. 그 많던 해솔이 이제는 몇 그루 남지 않은 섬도 있다고 한다.
우리 집 주변에 많았던 소낭은 내게 그리 관심을 끄는 나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피하는 나무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송충이가 득실댔다. 송충이는 소나무, 곰솔 , 잣나무 같은 소나무속 수종 나뭇잎을 갉아먹어 해를 끼친다. 송충이 천적인 새들도 많았는데도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가 소나무에 그득했다. 온몸에 털이 가득한 벌레가 기어 다니다 나무 아래로 떨어지면 짓궂은 개구쟁이들이 송충이를 밟아 솔잎 먹은 초록색 진액이 나오기도 했다.
70년 대, 소나무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송충이 방제작업을 위해 국가에서는 ‘송충이방제기간’을 정해 학생들과 공무원을 동원했다. 우리 고사리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학교 수업 후에 소나무밭에 가서 송충이를 잡아야 했다. 학교에서 준 나무젓가락과 석유 냄새가 나는 액체가 든 통을 들고 들로 나가 어린 소나무에 있는 벌레를 잡았다. 솔잎을 먹은 통통한 벌레를 나무젓가락으로 잡을 때는 물컹한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그 징그런 벌레를 잡으러 갈 때마다, 온 들에 소나무를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빽빽한 소낭 밭에는 새벽에 들에 다녀오던 어른이 발견한 주검이 매달렸다는 나무도 있었다. 아기 밴 처녀가 남몰래 고민하다 목을 매단 소낭에도 벌레가 기어 다녔다. 그래도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주의 남쪽 끝 시골 소녀도 소나무를 지켜야만 했다. 아이들이 잡아온 송충이는 모두 모아 땅에 묻었는지 모르지만 깡통에 드글거리는 송충이만 보아도 꿈에 나타날 지경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긴 대나무 끝에 솜을 감아 거기에 약품을 잔뜩 묻혀 소낭베렝이(송충이)몸에 발랐다. 소낭베렝이를 잡는 날은 긴 옷을 입고 벌레를 만진 적도 없지만 어디서 벌레 털이 닿았는지 소낭 밭에 다녀오면 목과 살갗 여기저기가 간지러웠고 엄청난 두드러기가 나곤 했다. 학교에서 동원했으니 어쩔 수 없이 갔지만 소낭베렝이가 득실대는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 날은 꿈에서도 송충이가 내 몸으로 떨어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수북한 털을 빳빳이 세우고 꾸물꾸물 내 몸 위를 기어가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곤 했다.
솔잎으로 배부른 송충이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계절이 오면 소낭 아래는 솔잎이 떨어져 가득했다. 동네 언니들과 포대와 글겡이(갈퀴)를 들고 소낭밭으로 간다. 나무 아래 떨어진 솔잎을 긁어모아 부대자루에 담아 솔가지를 꺾어 위를 막고 끈으로 얼기설기 주둥이를 묶는다. 긁어온 솔잎으로 불을 때 된장국을 끓이면 국에도 솔 향이 묻어났다. 아궁이에 앉아 솔잎을 던져 넣으며 일렁이는 붉노란 불빛을 말없이 지켜보며 나는 왠지 서글퍼졌다. 책에 나오는 도시 소녀들은 근사한 생활을 하건만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요원한 세상이었다. 그런 뾰족한 마음에 솔가지를 분지르며 아궁이에 집어넣으면 마음속 불만처럼 화르륵 불꽃이 일었다. 솔잎을 긁지 말라는 엄명으로 겨울철 즐거운 노동은 끝이 나고, 어느새 우리는 훌쩍 자라고 말았다.
모든 생물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치우고, 지네는 송충이를 먹고, 그렇게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사슬처럼 연결된 고리 중에 한 사슬이 급증하거나 끊어지거나 사라지면 생태계에 교란이 온다. 꿀벌이 사라지고 아무 때나 꽃들이 핀다. 기후 변화로 폭우와 폭염과 한파가 예고 없이 닥치며 빙하가 녹아 섬들이 잠기는 등 엄청난 혼란이 이미 시작되었다.
소낭에 득실거리던 소낭베렝이로 징그러운 기억이 있더라도 재선충병으로 잘려나간 엄청난 소나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재선충병이 더 이상 번지지 말아야 할 텐데.
추사의 <세한도>는 대정향교 마당에 있는 소나무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세한도의 해솔이 제주 곳곳에 번창하길. 박대성 화백이 그린 경주 삼릉의 소나무처럼 늠름한 한국 소나무가 저 들에 울창하게 자라 푸르른 우리 산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