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시대
모임에 가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말에 굶주린 사람들 같다. 남의 말을 들을 시간도 없고, 들을 의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아무도 듣지 않고 말만 넘친다.
누군가 말을 시작하는 순간, 언제 내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 결국 참지 못하고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 순간 끼어들고 만다. 통제하지 못하고 내 말을 앞세우고 만다.
천성적으로 조용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고요함을 즐긴다. 그럼에도 침묵을 굉장히 힘들어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때, 나는 문득 불안해진다. 그 불편한 시간을 메우려, 어색한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공부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고요한 정적을 참지 못하여 확실하지 않아도 손을 들곤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당돌한 건 아니다. 심부름 가서도 제대로 말을 전하지 못하고, 학예회에서 대사를 하면서도 눈물이 가득 고이던 나였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는 걸 고치고 싶었는지 엄마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이웃에 가서 엄마의 말씀을 전하고 와야 하는 일이 정말 힘겨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 말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는 걸 발견하면서부터 서서히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갑자기 끊기고 잠깐 낯선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독일어나 불어에서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인들을 만나고 그리 떠들고 있으니 천사는 지나가지 못하고 저쪽에서 기다리며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침묵이 불편해 그 순간을 서둘러 메워버린다.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악령이 깃든다고 여기기도 하던 시절 침묵과 대비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말이 멈추는 순간 천사가 현존하는 것으로 여겼던 걸까.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은 곧 마음의 말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 고요한 틈새는 내가 나를 돌아보고 상대를 살필 순간이다. 잠깐 말을 멈춘 그 순간, 나의 속도와 방향을 돌아보는 마음. 가득 채우려는 태도 대신, 잠시 멈추고 비워둠으로써만 들리는 말이 있다.
마음이 오가는 시간
침묵이 필요한 시간
오늘도 많은 말을 했다. 안 해도 될 말을.
입은 닫고,
귀와 지갑은 열고,
그게 어른이 할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