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어진저 Oct 31. 2024

영원의 순간

일상으로 새긴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몸에 난 작은 상처 하나에도 민감한 나는 예전에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 않게 떠나길 바랐다. 예를 들어 병으로 아프지 않아야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잠자듯이 떠나거나, 정말 원하지 않지만 사고라면 고통 없이 단번에 떠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바람이 변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지길 바란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떠나는 나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슬프더라도 아쉬움은 덜하지 않을까? 사실 내 좁은 인간관계에서 사람들이라고 할 것도 없다. 나는 남편과 작별을 고할 시간이 충분하길 바란다.     


 평온한 죽음을 바라며 ‘생의 마지막 순간 눈을 감을 때 떠올릴 찰나의 장면은 뭘까?’하고 떠올려 본다. 안타깝게도 죽음에서 돌아와 그 순간 어떤 장면을 떠올렸는지 내게 일러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길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에 나는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길 바란다. 이런 생각에 옆에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 떠오를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다. 머릿속 생각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같아서 무작위로 어느 날 어느 시간이 떠오를 수도 있다. 무더운 여름 석양 위로 날아가던 검은 새 한 마리나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추운 겨울의 파란 하늘 같은 것들. 하지만 내게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의지가 남아 있다면 일상적으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싶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걷던 동네 산책, 식탁 앞에 마주 앉아 함께하던 식사, 남편의 어깨에 기대 이러쿵저러쿵 푸념하던 일, 늦게 귀가한 남편이 누구를 만났는지 꼭 내가 만난 듯 성대모사로 알려주던 모습,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깔깔대며 웃었던 일. 무수히 쌓여서 언제인지 특정할 수 없는 남편과 함께 보냈던 날. 아, 그렇다. 내가 떠올릴 모습은 내가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했던 남편이다. 결혼 뒤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한 남편은 내가 행복한 순간, 늘 내 눈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그게 무엇이 됐건 나는 그와 함께한 순간을 떠올리고 싶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남편과 산책하길, 한 번만 더 남편과 웃으며 이야기하길 바라며 그 순간을 영원히 반복 재생하리라.     


 이런 깨달음으로 나는 남편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일상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되도록 매일 대화하고 잠깐이라도 함께 산책한다. 일상에 치여 어찌할 수 없을 땐 한껏 끌어안으며 서로의 체온과 체취로 마음을 채운다. 충전!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집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과 안정감이 든다. 그는 나의 울타리이고 나는 그의 집이다. 어디 그뿐일까. 고마운 마음이 들거나 좋은 점을 발견하면 사소해도 되도록 바로 표현한다. 집에서 서로 다른 공간에 있을 때 대뜸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외친다. “오늘 내가 사랑한다고 얘기했던가?” “어제 사랑한다는 말을 안 했어.” 이런 분위기에 이쁘다, 멋지다는 찬사가 빠질 수 없다. 이런 식의 고백은 우리 사이에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한 번 입 밖으로 내기 쑥스러웠던 연애 시절의 사랑 고백이 결혼생활과 함께 흔한 일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사랑까지 시시해지는 일은 없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더 깊어졌고 예전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도 알게 됐으며, 무엇보다 고백의 순간에 상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온전히 누리는 뻔뻔함도 늘었다. 우리는 부부에게 자연스럽지만 당연하지 않은, 매일의 안부를 묻고 물 한 컵을 건네며 서로의 기색을 살피는 일이 생각보다 강력한 사랑 표현법이라는 것도 배웠다.


 나는 우리의 행복이 순간으로 휘발되지 않고 일상에 오래 머물길 바란다. 날마다 애정으로 일상에 새기다 보면 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가 행복했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길 바라면서. 눈을 감는 순간 그의 웃는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따뜻하게 배웅해 주길.

작가의 이전글 서울 떠난 시골 쥐는 잘살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