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이 목표가 아니다.

정리만 되어도 훨씬 좋아진다.

by 힐링요트

주 호소(Chief Complaint)는 치료자가 정해주는 것

초진 환자나 입원 환자를 면담하면서 차트를 쓸 때, 늘 전공의들에게 말한다. "제발 환자를 취조하지 마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치 답안지를 작성하듯 주 호소(Chief complaint)와 병력(Present illness)을 기계적으로 묻고, 환자나 보호자가 한 말을 그대로 차트의 빈 칸에 채워 넣는다.

"제일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요."

주 호소란에는 '우울증'이라고 적는다.

"그동안 앓았던 병들을 말씀해 보세요. 언제 어떤 병을 앓았나요..."

병력란에는 이런 것들을 받아적는다.

나도 전공의 때 맨날 듣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진정한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

내 앞에 온 이 사람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한 궁금증을 가지고 알아가다 보면, 상담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무거웠던 표정이 사뭇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재발을 했거나 공황장애 같은 명백한 증상으로 약물 처방이 시급한 경우라면 예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상담이 필요한 경우, 병원에 올 때는 너무도 힘들어서 오지만 자신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오시는 분은 거의 없다.

함께 정리해 가는 과정

"왜 오셨나요?"

"무엇을 가장 해결하고 싶으신가요?"

"가장 힘든 문제 3가지만 말해보시겠어요?"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문제를 함께 정리해 간다. 그제서야 환자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다.

'내가 왜 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거지?'

'힘들게 하는 게 몇 가지인가?'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제에 쫓겨 허둥대느라 그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마치 폭풍 속에서 방향을 잃은 배처럼, 파도에 휩쓸려 가기만 할 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실타래는 점점 더 엉켜버린다. 하나의 문제가 다른 문제를 낳고, 그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 급기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도움을 요청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치료자의 진정한 역할이 시작된다. 환자가 말하는 '우울증 때문에 힘들다'는 것을 그대로 주 호소로 적는 것이 아니라, 정말 무엇이 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우울증이 어떻게 힘드신가요?"

"언제부터 그런 기분이 드셨나요?"

"그 시기에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지금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서서히 실타래를 풀어가다 보면, 환자 스스로도 놀란다. '아, 내 문제가 이런 것이었구나.'

정리의 힘

문제를 정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제를 나열한다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과 상황들 속에서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해결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가 "모든 것이 엉망이에요"라고 말할 때, 치료자가 "그러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것부터 차례대로 정리해 볼까요?"라고 제안하는 순간,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 호소를 다시 쓰다

그렇게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후, 차트에 적는 주 호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우울증 때문에 힘들다'가 아니라,

'6개월 전 어머니 사망 이후 죄책감과 불면, 무기력감으로 일상생활 유지 어려움'이 된다.

'불안해서 왔다'가 아니라,

'직장 내 대인관계 갈등으로 인한 불안, 공황 증상으로 출근 곤란'이 된다.

변화의 시작

이렇게 정리가 되고 나면, 환자의 표정이 달라진다.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 있지만, 이제 그 문제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서는 정리할 수 없었던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를 누군가와 함께 차근차근 풀어갔다는 경험 자체다. 그 경험이 희망이 된다.

주 호소는 환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자가 환자와 함께 찾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치료자는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진단명이 아닌, 한 인간의 삶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폭풍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던 배가 등대를 발견하는 순간처럼,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마음이 비로소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 길을 함께 찾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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