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명이 아닌 마음을 듣다

by 힐링요트


"가장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

"우울증 때문에 왔어요."

많은 환자들이 이렇게 시작한다. 마치 '우울증'이라는 세 글자가 자신의 모든 고통을 설명해줄 것이라고 믿는 듯이. 하지만 진료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단명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겪고 있는 마음의 아픔이다.

"우울증이라고 다른 곳에서 진단받으신 적이 있던가요?"

"아니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우울증인 것 같아서요."

만약 여기서 "그러면 우울증 약을 드릴게요"라고 했다면, 진짜 상담은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는 진단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이해가 깊어진다. 진단은 단지 이름일 뿐이다.

"어떤 점 때문에 우울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나요?"

"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나요. 내가 무가치한 인간인 것 같아요."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되었을까요?"

"1년 정도 된 것 같아요."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증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다. 마음의 상처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제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외국에서 가족여행 중이었는데 교통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연락을 받고 가보니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였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어머니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우리끼리 가라고 했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갔더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후회가 되고 우리끼리 간 것에 대해 죄책감이 생겼어요."

그뿐만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유산 문제로 형제들과 몇 번을 싸우고 난 뒤, 이제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를 잃고 형제들도 잃은 셈이었다.

"외롭고 지치고 엄마한테 미안해요. 그러고 난 후 의욕도 없고 세상 사는 의미도 못 느끼겠어요."

견딜 수 없는 한계점

"1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온 이유가 있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이젠 정말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죠? 견디지 못한다면?"

"죽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어요. 출구가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이걸로 죽는다고요?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약 1.7%. 우리나라 인구를 5천만 명으로 잡으면 85만 명. 이런 경험을 했거나 한 사람은 7.7%, 385만 명이나 되는데요."

"정말 그렇게 많아요?"

"나만 힘들어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던데요."

"나도 우울증으로 약 먹고 좋아진 적이 있어요."

"선생님도 우울증으로 약을 먹었다고요?"

"네. 정말 힘든 시기가 있었죠. 마치 깜깜한 기차 터널을 걸어가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는 마음이 많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깜깜한 터널 저 끝에 바늘구멍 만한 빛이 시작되다가, 결국 내 온몸을 다 비춰줄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 포스터에 주인공이 탈옥하고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림이 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마음이 두근거려요."

"선생님도 우울증을 앓았군요."

"많은 사람이 우울증을 잘 겪고 나면 마음이 더 깊어지는 것도 경험한답니다."

우울증이 꼭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구체적인 고통들을 하나씩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침묵 후에 터져 나온 말들.

"잠을 잤으면 좋겠어요. 잠을 못 잔 지 며칠이 되었어요. 뒤척거리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와요.“

선생님은 이럴 때 기분을 잘 모르실 거예요.

"아니에요, 난 잘 알아요. 새벽이 반갑지 않아요. 결국 한숨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구나 하는 좌절감이 들어요. 잠잘 때가 가장 편안한데... 어쩌다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면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나 하는 막막하고 잔잔한 불안감은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선생님도 정말 우울증 걸려봤네요."

그렇다. 나도 경험했기에, 그의 고통이 얼마나 절절한지 알 수 있었다.

무너진 일상들

잠 다음에는 무엇이 불편한지 물었다.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어요. 그냥 기분이 없는 기분이에요. 어떻게 살아가죠?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아요."

직장에 사표를 낼까 고민한다고 했다. 출근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집중하지 못해서 일을 제때 하지도 못하고 실수도 많아서 지적도 많이 듣는다고 했다.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눈치도 많이 본다고.

"뭘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요. 며칠 전에는 운전하다가 사고도 냈어요."

그리고 가장 마음 아픈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이들에게 짜증을 많이 냈어요. 밥 먹다 물그릇을 넘어뜨려 쏟았는데 화가 나서 견디기 어렵더라고요. 오늘은 동생과 싸워 울렸다고 야단을 많이 쳤어요. 머리로는 안 그래야지 하지만 막상 조절이 안 되요."

"자는 모습을 보면 미안하고 내가 참 나쁜 엄마 같아요. 남편도 이런 나를 이상하다고 하고 변했다고 해요."

집안 정리를 잘 못하고, 냉장고에 음식이 다 상하고, 시어머니 생신에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해서 서먹해졌다고 했다.

"집에 오면 애들도 나에게 잘 안 와요. 아버지하고만 지내려고 해요. 나를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우주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아요."


"식사는 잘 합니까?"


"아니요. 식욕이 통 없는데 음식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아요. 체중도 3kg이나 빠졌어요."

정리와 희망의 시작

"정리하자면 당신이 가장 힘든 점은 우울, 무기력, 무가치함이네요. 증상들을 정리하면 불면, 식욕부진, 무기력, 우울감, 자존감 저하, 대인관계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우선 먹고 자는 것부터 고칩시다."

이 말이 그에게는 첫 번째 희망의 빛이었을 것이다.

"우울감은 오래 견딜 수 있지만 먹고 자는 게 안 되면 한 달을 버티기가 힘들어요. 먹고 자는 것은 약물과 운동으로 고칩니다. 먹고 자는 것이 좋아지고 나면 가장 힘들게 하는 우울감도 서서히 호전됩니다."

"자존감 문제와 관계 문제는 그다음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순서로 풀어나가면 반드시 좋아집니다."

"죽을 병도 아니고 죽을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환자는 아직 약도 먹지 않았지만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료실에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달라진 기분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치료는 진단명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우울증'이라는 세 글자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고통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작은 희망이라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료의 첫걸음이다.

깜깜한 터널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 그 끝에서 쏟아지는 빛을 온몸으로 받아낼 날이 반드시 온다.

작가의 이전글해결이 목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