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더라

경험이 쌓일 수록 어렵지만 깊어지는 삶의 원리

by 힐링요트

전공의를 시작했을 때, 환자 치료는 단순 명료했다. 진단과 치료는 교과서에 있는데로 하면 되었다. 정신과 병동에는 주로 조현병, 조울병, 우울증 정도의 환자만 있고 각 진단에 따라 주로 쓰는 약 몇 가지와 부작용 방지약, 보조약 정도만 알면 되었다.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하늘에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하고, 잠을 거의 자지 못하던 환자도,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자신을 도청하고 감시하고 있다고 주변을 살피며, 귓속말로 대답을 하고 병동 창문에 항상 커튼을 치고 그 틈새로 밖을 내다보던 조현병 환자도 할로페리돌이라는 약을 쓰면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잠도 잘 자고 눈빛도 또렷해지며 차분한 대화가 가능해진다.


중앙정보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민망한 웃음과 함께 얼버무리고 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콧노래가 나오는 기분이었다. '정신병이 과연 나을까'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환자의 기대 이상의 빠른 회복은 나의 자신감을 한껏 높여 주었다. 증상과 치료 약을 알려 주는 교과서를 경전처럼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쯤 부터, 봄에 퇴원해 갔던 그 환자들이 한결같은 스토리로 외래 진료를 뜸하게 오다가 투약 중단으로 재발해서 결국 입원했을 당시 모습보다 더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발이었다.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치료가 일시적이었다는 현실에 나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환자의 재발과 함께 자신감에도 상처를 입었다. 세상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는 환자와의 관계 맺기도, 약물 교육도, 가족 교육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 메뉴얼 한 권이면 해결될 줄 알았다. 병을 앓는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증상만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그때는 몰라서 힘들었고, 지금은 알아서 더 힘들다.

2년 전, 신환 여러 명을 동시에 입원시켜 치료하던 어느 날이었다. 과로에 지친 나머지" 다른 직종은 30년 이상 하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나는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것 같아" 혼자 투덜거린 적이 있다.

왜 그럴까? 경력이 쌓일수록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이 많아지고,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훨씬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잔뜩 어질러진 방을 도무지 어디부터 치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공의 시절 약물을 고를 때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어느 약물이 잘 들을까?'라는 질문 하나면 충분했다. 약물의 효과만 보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물의 종류는 훨씬 더 많고 다양해졌는데, 막상 처방하려고 하면 쓸 약이 없다고 느껴진다.

마치 부인이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을 열어보고 "입을 옷이 없다"며 한숨 쉬는 것과 같다고 할까. 옷은 많은데 오늘 날씨에, 오늘 일정에, 오늘 기분에 딱 맞는 옷은 없다는 그런 심정 말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각 약물의 미묘한 부작용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부작용으로 고생한 경험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더럭 겁이 난다. '이 약은 체중 증가가 걱정되고, 저 약은 졸림이 문제고, 그 약은 생리불순을 가져 올 수 있고...' 그렇게 하나하나 걸러내다 보니 손에 남는 약이 거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확실히 경험이 적을 때가 더 편했다. 정신과 교과서 안에 다 있으니 그것만 보면 되었다. 교과서는 최소였고 진정한 치료는 교과서 밖 현실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의 나르시시즘 이었는데, 그것을 자신감이나 자부심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환자를 '보지' 못했다. 증상만 봤다.

증상을 없애고 퇴원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지금부터가 환자의 삶의 시작인 것을. 환자가 겪어야 할 현실의 무게, 어쩔 수 없는 약물의 부작용, 재발의 두려움, 입원의 고통, 부모의 가슴에 맺힌 상처도 이제는 보인다. 보이니까 고려해야 하고, 고려하니까 복잡해지고, 복잡해지니까 더 조심스러워진다. 퇴근 후 병원에서 전화 오면 가슴부터 철렁 내려 않는다.

그래도 약은 써야 한다. 잘 써야 한다. 망상과 환청등 증상을 치료하면서도, 살이 찌지 않고, 너무 졸립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고 생리 불순도 없어야 한다. 맞춤 옷과 같은 편안한 약을 찾는 것. 이것이 정말 어렵다. 이것을 처방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완벽한 치료란 없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도 때로는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다시 일어서고 포기하지 않는 치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어려워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진짜 의사로 익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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