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행

by 힐링요트


노크 소리가 약하게 두 번 들렸다. 잠시 후 30대 남성이 헐렁한 배낭을 매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조현병으로 한 번 입원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가족 사업을 도우며 외래 진료를 꾸준히 받고 있는 분 이였다. 평소와는 달리 의자에 앉을 생각도 없이 뒤쪽에 쭈뼛 서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 진료받으러 온 게 아니고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제가 지금 제주도 가는데, 선생님한테는 꼭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고는 곧장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세요" 하며 깊게 인사를 꾸벅하고는 막 뒤돌아 나가려 했다.


순간 이상함이 번개처럼 스쳤다. 여행을 가는데 주치의에게 굳이 인사하러 왔다고? 여행 가방도 없이 속이 텅 빈 것 같은 배낭 하나만 메고? 무엇보다 앞으로 굽어 잔뜩 움츠러든 그의 어깨와 뭔가 비장하면서도 개운하다는 표정이 평소 알던 그와는 사뭇 달랐다.

'안녕'이라는 메시지만큼은 명료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인사?

이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잠깐만, 이야기 좀 합시다."


얼른 일어나 그를 의자로 안내했다. 괜찮다고 뿌리치려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강하게 권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제주도 여행 간다고요?“

"예.“

"어떻게 갈 건데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부산 가는 버스를 타고, 부산에서 제주도 가는 배가 오후 8시에 출발해요.“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이런 정보도 전화를 걸어 꽤 품을 팔아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과 방법까지 알아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았다.

"배 여행이라, 재미있겠네요. 제주도는 혼자 가요? 며칠 있을 예정이에요? 어디를 가볼 계획이고, 잠은 어디서 잘 건데요?“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산까지 가는 것과 부산에서 제주도 가는 배를 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후의 계획은 필요 없었으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결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사실 선생님, 저는 마지막 여행을 가는 거예요. 제주도 가는 배를 탈 때 이 배낭에 돌을 넣어서... 배를 타고 가다가 한밤중에 바다에 뛰어들면 아무도 찾지 못하겠죠.“

'역시 그렇구나.‘

놀라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휙 하고 지나갔다. 저절로 한숨이 쉬어지고 다리에 힘이 죽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자신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작업장에서 사람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며 흉을 본다는 피해망상과 관계망상, 환청 증상으로 내게 온 환자였다. 매우 내성적이고 소심했다. 착한 성격 탓에 망상에 의한 피해를 느껴도 화를 내거나 자기주장도 못하고 주로 참는 편이었다.

부모 사업을 돕고 동생을 걱정하는 착한 형이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남 탓을 하는 법이 없었지만, 가족을 걱정하고 자신의 역할을 하려 노력하면서도 항상 긴장하고 기가 죽어 있는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져 평소 많이 격려하고 응원했다. 그는 나에게서 '잘해줘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한 번의 입원과 외래 치료로 현재는 증상 없이 일하며 잘 지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첫 만남에서 입원을 권유했을 때도 놀라고 매우 싫어했지만, 부모와 내가 강하게 권하자 거절하지 못해 순순히 입원해 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마도 거절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 것이다.

재발했을까? 아닌 것 같은데. 외래 약 타러 올 시간도 아직 남았고 재발한 것도 아니었는데, 불쑥 찾아와서는 여행 간다며 선생님한테만은 인사하고 가야겠다고 해서 들렸다가 바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다시 차근차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다고 결심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IMF 때문에 집안이 다 망했어요. 장사도 안 되고 빚만 늘어나서 부모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동생까지 실직하고 이혼해서 다시 집으로 왔어요.“

그의 목소리에 절망이 묻어났다.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고 짐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없어지면 가족들이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주도 가는 배를 타고 마지막 여행을 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한테는 꼭 고맙다고 인사를 꼭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병원에서 월급을 받고 있던 나는 IMF의 고통을 뉴스로만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그 고통이 몰려오고 있었다. 누구는 생활의 터전을 잃고 누구는 삶을 포기한다는 뉴스를 지금 현실에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재발한 것도 아니고 동생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망했다고 하지만 가게도 그대로 있고, 밥을 굶을 정도도 아니었다. 망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위태롭게 버티던 환자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현병을 앓고 있어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그를 더 이상 설 수 없는 곳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아무개 씨, 제주도는 다음에 갑시다.“

결정이 내려졌다는 일방적인 태도로 말을 던졌다.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100% 자살한다는 확신을 가진 나의 선택지는 단 하나, 입원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부모님이 병원에 올 수도 없고 입원비 낼 돈도 없어요. 우리는 망했다니까요."


그의 말에서 절망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그 입원비는 내가 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냥 나왔다. 이 상황을 무조건 해결해야 한다고 느낀 나의 절박감이 시킨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단호한 의지를 쏘아 보냈다.

예상대로 내가 이겼다. 내 확고한 눈빛이 그를 설득시켰다. 원래 착하고 상대방의 강한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을 잠깐 이용했다.

그는 내키지는 않지만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푹 쉬더니 입원하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마음이 순간 바빠졌다. 날아갈 듯 입원 수속하고 냉큼 병실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나서야 진료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재앙을 피한 것은 두 사람이었다. 그는 목숨을 살렸고, 나는 마음속 오래된 상처가 다시 재발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상처도 충격을 받으면 마치 활화산에 용암이 다시 흐르듯 고통이 재발했다.

그는 입원 3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내 환자들 중에서 가장 단기간 퇴원하는 경우였다. 입원이 길어질수록 내 부담도 커지니 서둘러 치료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무너진 자존감과 붕괴된 외부 환경에 대한 인식을 재건했다. 그는 더 이상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나에게 있었다. 자살하러 가기 전에 내게 와서 인사하고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와 연결해 둔 관계를 뿌리치고 자살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퇴원하는 날, 내 눈을 쳐다보며 '그동안 참 감사했습니다' 하는 감정이 담긴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다. 역시나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가볍게 목례를 하고 총총한 발걸음으로 거의 한 달 만에 귀가했다.

집으로 가는 뒷모습에서 인사조차 시원하게 다 하지 못하고 가는 민망함과 수줍음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고마움이 그의 마음에서 부담감이라는 부작용만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제주도 가는 큰 배가 떠오르고, 그 배를 부두에 묶어놓은 굵고 육중한 계선줄이 머리에 떠올랐다. 관계는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 그는 나에게 자기 가게에서 파는 물건을 선물로 보냈다. 직접 갖다주지 못하고 늘 우편으로 보냈다. 마치 커튼 뒤에서 '나 잘 있다, 그리고 고맙다'고 수줍게 고함치는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이 적힌 소포를 받으면, 진료실 창문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모든 사례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지만, 개인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세부 내용은 변경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마음의 풍경화'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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