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공 입성기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나

by 유영하는우주인




나의 상공 입성기








"네 이로는 승무원이 될 수 없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게 찾아온 건 두 가지였다. 절망 혹은 반항심. 절망이란 앞으로 비행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반항심이란, 나는 전직 승무원이었는데 네가 뭘 알아 하는 가슴 깊은 곳에서 훅 올라온 열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 면접관에게


"말해줘서 고맙고 오늘 좋은 하루 보내라. 나는 가겠다"


라고 말하고 그 면접장을 뛰쳐 나왔다. 면접장을 그렇게 나온 건 아마 내 인생 마지막일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 인생에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교정을 결심했고 바로 치과를 찾아갔다.




그리고 약 2년이 흘렀다. 나는 마침내 교정을 마무리했다. 그간 일들이 많았다. 쉽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동기들은 하나둘 좋은 회사에 입성해 비행을 이어갔다. 인생은 늘상 불확실성의 반복된 과정이라고 하나, 내 인생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약속을 취소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한국인을 뽑는다는 친한 언니의 소식에 나는 지금의 항공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회사는 계속 한국행을 미루고 미루고 미뤘다. 왜냐하면 불확실성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코비드는 모든 이들의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고 큰 회사마저 흔들리게 했다. 그런 와중에 코비드가 마무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비(Invitaion)가 왔다. 드디어 기다려온 때가 온 것이다.나는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수십번이나 해외 오픈 데이(Open Day)에 참여해왔다. 그리고 교정을 하는 동안은 코비드 기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어 공부는 소홀히 했고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 탓에, 한국말도 잘 하지 않는 판국에 영어까지 어찌하랴.


아니다, 이건 내 의지 문제이다. 그래, 나는 운이 좋지 않았더라면 또 미끄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번엔 해내었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조건들이 지금의 회사가 나를 원하도록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교정을 마친 것이다. 교정이 끝났다! 드! 디! 어! 정말 묘한 일이다. 이가 고르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더 많은 이유로(나는 잘 모르지만) CV Drop에서 매번 떨어졌다. 늘 마음을 챙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곁에서 함께 준비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남은 건 나 하나였다. 나 혼자. 하하하하.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심정은 어쩐지 서글프다. 이쯤, 중단하고 다음에 이어서 써야 할 것 같다.







이어서, 다시 쓰는 이야기.


그래서 갑자기 나는 인천으로 가게 되었다. 코로나의 우려 때문인지 카타를 인천에서 크루 숙소로 사용하는 하야트로 오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하야트 근처에 숙소를 잡고 교통편을 예약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긴 했다. 불안함도 찾아들긴 했지만 말이다. 할 수 있을까? 이번엔 진짤까? 답도 없는 의문이 나를 힘빠지게 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면 힘든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쓸데없는 데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흔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나도 여전히 사랑한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슬플 수도, 우울할 수도, 기쁠 수도, 화를 낼 수도 있다. 모두 나일뿐. 아무튼 그때의 나는 인터뷰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불안감과 꼭 카타르 땅을 밟고 싶다는 소망이 교차하며 어지러웠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안은 채로 인천으로 향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아무것도 없었으나 지금의 회사가 온다는 핫한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하야트 호텔은 매우 붐볐다. 숙소는 가까웠으나 나는 사전답사를 갔다. 길에 익숙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다.왜냐하면 나는 어피를 할 것이고 높은 구두를 신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호텔 들어가서 갈아 신는다.)




날이 밝았다. CV DROP 당일이 된 것이다. 운이 좋아 아침 8시자로 인비가 왔다. 나는 차라리 먼저 보는 걸 좋아한다. 결과를 빨리 알 수 있고, 빨리 내 진로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늘 CV DROP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건 카타르가 규정한 일정한 사항에서 내가 제외됐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나는 길바닥에서 혼자 엉엉 울거나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열정적이었고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사랑한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나는 속 깊은 곳에


'내가 또 떨어질 수도 있다'


는 전제를 깔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후회없이 떨지 말고, 인터뷰 준비를 많이 못했더라도 떠들고 오자. 나는 교정을 했고 이건 큰 변화다. 영어는 제 2외국어다. 면접관들조차 영어권 국가가 아닌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하기로 맘 먹었다. 일찍 온 사람들, 먼저 와서 이미 다음날로 가는 여정을 확정지은 사람들도 면접장은 북적거렸다. 나는, 이쯤에서 일어나 줄을 섰다. 4명의 면접관, 커다란 조명, 떨며 기다리는 사람들... 그 안에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미 시간이 여기까지 날 데려다 주었고 꼭 좋은 결과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완벽한 순간은 없다. 준비가 되었든 안 됐든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나는 마음을 다 잡으려고 노력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의 면접관은 K였다. 면접관 중의 면접관으로 이미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그녀. 그 정도로 이름난 면접관이었다. 나는 천천히, 차분하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이력서를 내밀자 그녀는 내 이력서를 쭉 훑어보았다. 나와 이력서를 번갈아 보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무표정했고 던지는 질문도 차가웠다.


대부분 경력 기반이었다. 나는 차분하다가도 가끔은 흥분해서 말했다. 횡설수설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시작한 문장은 끝내려고 했다. 떨거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못 했던 것 같은데, 면접관은 어쩌면 흥미로운 눈빛으로 연신 나를 바라봤다. 내 피부를, 나의 치아를, 내 걸음걸이를,나의 화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태도까지도. 알다시피 면접관도 우리의 대답을 하나하나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자신있게 답하려고 했다. 그녀는 나를 전처럼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희망이 보였다. 나는 점점 더 자신감이 붙었다. 경력을 검증하고자 던지는 질문이 세밀해질수록 나는 더욱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간절해졌다. 제발...



나는 숙소를 또 잡아야만 했다. 그랬다. 드디어 내가 그 종이를, 종이를 받은 것이다! OMG!!!!!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 하며 짐을 챙겨 조용히 호텔을 빠져나왔다. 내가, 내가, 내가!!! 드디어! 이게 몇 년만이던가. 나는 너무 얼떨떨해서, 숙소를 연장하거나 다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의 심정은


미쳤다


였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프로세스가 구만리였기에, 나는 침착하려고 했다. 영어 테스트, 스몰톡 그리고 마침내 파이널. 나는 숙소를 연장했다. 금방 떠날 줄 알았던 인천에서의 하룻밤이 더 추가된 것이다. 나는 한숨 자기로 하고 어피를 제거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어제도 몇 시간 자지 못했으나,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것은 어떤 불안감이었고 나는 그때의 나를, 그때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직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그 경험은 내가 후에 승무원 업무를 수행하며 맞이할 권태기에 조심스레 꺼내보며 나를 다독일 소중한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면접 준비는 하지 않으나 불안해하는 상태'에서 멈춰 있었다. 그래도 밥은 제때 잘 챙겨 먹었다. 밥심이라고, 어른들 말이 틀린게 하나 없다.


나는 서둘러 다음날을 준비했다. 사실 준비라곤 꼴랑 밥을 제때 챙겨 먹은 일뿐이긴 했다. 잘했다 생각한다. 커피도 마시고 할 건 다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다. 그치만 스스로가 대견하다.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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