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으로
둘째날 예정된 것은 영어 테스트와 스몰톡이었다. 영어 테스트는 혹시 몰라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보고 갔다. 비율과 시간 등을 계산하거나 문장을 완성하는 등 토익에 가까운 문제들이 널려 있었다. 수학엔 약하지만 최대한 동생의 도움을 얻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그렇다. 갑자기 이들이 영어 테스트를 전면 개편한 것이다. 문제를 받아 읽으며 나는 너무 놀랐다. 다음 단계로 향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스크를 썼기에 망정이 아니었으면, 콧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4월은 아직 추웠다. 반팔의 블라우스를 착용하기에는.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항간에는 '시험을 보는 태도'를 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걸 믿으며 혹은 한편으론, '그래. 여기까지 온 것도 많이 왔다'라고 생각하며 침착하려고 했다. 비행을 하는 와중엔, 늘 일이 그렇듯이 황당한 일들이 무수히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영어 천재인 척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곰이 나오는 이 지문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긴가민가, 제한 시간에 끝내야 하는 이 시험이 참으로 나를 피말리게 했다.
시험지를 걷어간 면접관들은 우리를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기다리는 동안 안면을 튼 지원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연회장 밖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다들,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연신 수다를 떨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또 나는 '떨어질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금번 항공사 채용 과정에서 늘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후련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됐다, 새 진로는 모색하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기다리는 동안만은 초조했지만 맘을 다 잡으려고 애쓰고 또 애썼다. 잘 되지는 않았다. 웃고 있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이윽고 면접관들이 우리를 불러 들였다. 앉기가 무섭기에 번호를 호명했다. 그것도 꽤 많이. 번호를 부른 사람이 붙는지, 안 불린 사람이 붙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그저 떨며 기다렸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지금 번호를 부른 사람은 나가도 좋아. 와줘서 고마웠어. 좋은 하루 보내길"
그렇다!!!! 스몰톡 단계로 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 결과를 듣고 울며 웃는 소리로 연회장이 시끄러웠다.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스몰톡? 스몰톡을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후기들을 살펴보면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하고, 암리치를 재고, 그리고... 그리고... 뭐더라? 하는 사이에 내 차례가 왔다. K와 한 명의 사무장 즉, 퍼서와 면접을 봤다.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했다.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외국인은 드물어서, 나는 스몰톡과 파이널에서 K가 내 이름을 명확하게 발음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마치 대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 때의 두려움과 같달까.. 가벼운 안부 인사였고 사실 면접관들이 내 대답을 듣지 않음을 알았다. 그들은 들어선 나의 어피와 머리 모양, 걸음걸이와 몸매를 훑었다. 내게 암리치를 요구했고 나는 신발을 벗은 뒤 이를 진행했다. 테이블을 하나 놓은 채로 나는 면접관들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면접관들의 뒤에는 대형 조명이 자리잡았다. 우리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고 나는 그들이 내 피부와 자잘한 흉터를 보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갑자기 K가 두 손을 쫙 펴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나는 망할 놈의 상처가 있었기에, 먼저 이를 시인했다.
나 "이건 최근 생긴 상처고, 난 필요하다면 피부과에 가서 의사를 만날 거야"
K "그거 낫는 데 얼마나 걸려?"
나 "2주쯤?"
K "그럼 2주 후에 네 두 손을 찍은 사진을 우리한테 보내줘야 돼"
나 "물론이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사무장과 내게 너 코에 난 건 뭐냐고 물었다. 코에? 코에 뭐가 났기에?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친절하게도 그녀가 내게 거울을 꺼내 보여줬다. 그것은 마스크 코부분이 닿아 화장이 벗겨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을 모면해야 한다는 급함으로 여드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냥 화장이 지워진 거라고 하면 될 것을. 의외로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리고 이어진 면접은 사실 그리 쉽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던진 질문은 무난하지 않았고,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탐탁지 않은지 두번째 질문을 했다. 겨우, 겨우 답을 했고 나는 캐서린이 낮은 목소리로 옆의 CSD에게
"Next time..."
어쩌구 하는 것을 들었다. 두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다음 단계로 그녀를 보내자.
다음 채용 때 그녀를 부르자.
나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나가길 원했고 내 스몰톡은 길어봐야 10분 내에 끝났다. 그들은 내게 잠시만 다음 면접자가 기다리도록 말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리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뭘까. 나는 붙은 걸까 떨어진 걸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결과를 들어야 했기에, 나는 다시 연회장 내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앉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인연이라는게 참 소중하고 알 수 없는 것이, 그때 이야기를 나눴던 한 분과 파이널부터 조인까지 끊임없이 카톡을 했고 우리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났다. 여전히 서로의 로스터를 공유하며 한 달에 한 번씩 꼭 만나고 있다. 그것이 참으로 묘하고 근사했다. 우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초조하게 기다리며, 다들 서로가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다들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K가 들어와 번호를 호명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불린 사람이 붙는지, 안 불린 사람이 붙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번호가 불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번호를 부른 사람 외에는 다 나가도록 해. 와줘서 고마워. 좋은 하루 보내"
나는 내 심장이 쿵 추락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금세 친해진 사람들과의 갑작스러운 이별 그리고 급하게 배정된 파이널 시간과 파이널 폼 작성 요령에 대해 들었다.
K의 NEXT TIME...은 바로 1번이었다. 다음 단계로 나를 보내는 것. 엄청난 결과다. 세상에나!
파이널 날이 밝았다. 어제와 똑같은 화장을 하고 진하게 입술을 마무리했다. 더 잘하고 싶은 맘 때문인지 피부 화장을 한 번 하고 지운 뒤 다시 했다. 예정보다 파이널이 빨리 진행되어 일찍 출발해야 했다. 맘이 급해졌다. 분명 넉넉히 시작했는데 어쩐지 마지막엔 초조했다. 그래서 분주히 짐을 챙겨서(체크아웃) 호텔로 향했다.
일부러 지원자들을 시간대별로 나눴기 때문에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오픈 카톡방에 발빠르게 면접이 빨라진다는 걸 공유해주셨기에, 나는 더 서둘렀다. 짐을 연회장에 두고 스몰톡을 진행한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하고 서로 격려해줬지만 내심 다들 떨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나와 그들을 응원했다. 누가 되었든, 가장 멋진 크루가 되길 바랐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말이다.
마침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또 엄청 떨렸다. 그러나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했다. 내 인사를 듣진 않았지만 늘,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하려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적절하게 사용했으며 호응도 잊지 않았다. 나중엔 약간 과하지 않았나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나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차라리 잘했다고 생각했다.
긴 테이블에 K와 다른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서류가 쌓여 있었다. 우리는. 파이널폼을 함께 확인했다. 생각보다 무난했다. 앞에서 면접을 보았던 분들은 10분 이상, 롤플레잉을 하고 분위기도 좋았다고 했으나 나는 아니었다. K와 사무장(이라고 소개한)다른 면접관은 나를 시종일관 뚫어져라 쳐다봤다. 냉정한 표정이었고 전혀 웃지 않았다. 일반적인 카타르 면접 질문을 하다가, 갑자기 롤플레잉을 시작했다. 그녀들은 내 질문을 하.나.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흡사 나는 트레이닝을 받는 것 같았고, 적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일장연설을 들었다. 현직 사무장까지 있으니, 나는 혼나고 또 혼났다. 마치 브리핑룸에서 깨지는 것 같았다. 급기야 웃는데,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생에 그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그리고 어떤 물음에 대해 내 대답을 맘에 안 들어해서, 그럼 내가 가서 잘 배우겠다고 하자(아주 일반적인 답변 요령) 그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K는
"아니. 우린 BEST만 뽑는다"
고 답했다. 그 말이 어찌나 차갑던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난 당황했지만. 어떤 면접자라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Really? That is amazing”
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내가 당황하는지, 그때에는 어찌 대처하는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면접은 생각보다 짧았다. 5분 내외였던 것 같다. 나는, 나오면서도 나의 합격을 확신할 수 없었다. 워낙 말을 이리저리 바꾸는 곳이고, 자기들도 티켓이 나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합격'했다고 하지 말라고 입조심을 시키는 곳이라서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다행히 나는 모든 일정이 아침이어서 부지런히 일행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결과에 대한 부담으로 심정이 말이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속이 후련했다. 내가!
이 내가! 드디어! 1위 항공사의 파이널까지 갔나니!!!!!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모든 것은 진인사대천명이리라.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비록 면접을 충실히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맘고생 하느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죽은듯이 잤다.
다음날 오후 늦게 눈을 떴을 때 카톡 알림으로 인해 깜짝 놀랐다. 카톡이 미친듯이 쌓여 있었다. ACZ링크(일명 전신 사진 링크) 가 돈 것이다! 그리고 내게도 링크가 도착해 있었다.
미쳤다!!! 와, 내가? 내가? 저요? 저 맞아요?! 나는 그 링크가 온 메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직도 그때의 내가,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응원했던 이들이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