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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신비 Jul 04. 2024

글, 어떻게 쓸 것인가?

경험과 선험을 넘어



우리 흔히 자신이 경험한 것만 써야 한다는
강박 가질 때 있다.

그럴 때라도 소설과 시나리오는 예외다.
시도 물론.
칼럼도 마찬가지.
여기서 글이란 경험담 수준 벗어나
더 큰 세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

말하고 싶다.

제가 경험한 것만 쓰겠다는 것은
세계와의 대면 회피하고 독백만 하겠다는 것
'나'의 고립과 자폐
나만의 동굴에서 고백하겠다는 것

그러나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

'나'는 세계에 포함되지만
구별하는 순간 분리되고 만다.

그럴 때 '나'는 세계의 부품이 되고 나사 하나가 되고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된다.
부스러기 된다.

혹자는 '나'의 내면 향해야 글이라고 하고
거대담론은 '나'를 외면 도피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를 향하는 글은 내면에 침잠하여
관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자칫 세계와 유리된 방백에 머물 수 있다.

거대담론은 '나'를 포월하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삶의 이면을 직조하고 발설한다는 '시'는
집요한 시 정신의 산물일 수 있으나
세계의 진실과는 먼 자기만의 미학일 수 있다.

자기만의 독보적 미학을 '시'라고 부른다면
'나'를 포월하는 '세계와의 직면'은
거대담론이라 명할 수 있다.

'거대담론'이 부담스럽다면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뜻으로
철학담론이라 해도 좋다.

철학담론도 거추장스럽다면 깨달음이라 하면 된다.
깨달음이 위화감 준다면
대화 혹은 소통이라고 해도 좋다.

글은 세계와 나의 링크.
'나'와 나 아닌 것들의 화해
허그

'세계와의 불화'가
주인공이나 화자의 캐릭터일 수는 있으나
이미 '세계와의 연결'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말자.

연결될 것이 연결되지 못했으므로 이야기가 되고
고뇌가 되고 캐릭터 되는 것
끝끝내 '세계와의 직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학의 의미다.

문학의 궁극은 인류 구원
시 한 줄이 죽어가던 이 살린다.
작은 들꽃 한 송이가 우리 구원한다.
성장하는 주인공은 우리를 사랑하는 신

세계와의 연결 고민하지 않고서
내면 향하는 것은 허공에 짓는 집
무인도에서 홀로 매너에 대해 탐구하는 것

나만의 독보적 미학은 체계화된 말장난일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너를 초월한
우리 둘러싼 세계에의 사유로서
부디 자기만의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나의 경험도 너의 경험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다운 통로 있다.

세계와 대면하고
우주와 격의 없이 깨벗고 놀 때
'시'가 수면 위로 드러나 그 형형한 자태 보이는 것

'나'의 시체 넘고 넘어
저 너머까지 나아갈 때
우리 온몸 글이 되고 시가 된다.

우주 한 바퀴 돌아
자신의 뒤통수와 만나고
그 뒷모습 뚫고 전진할 때
제 내면과 만날 수 있다.

단 한 사람 친구
단 한 사람 독자 만나더라도

그래야 글이다.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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