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고 인류를 살리는 낭만
빌리 아일리시의 <lunch>라는 노래가 있다.
“난 점심 먹듯 그녀를 먹어버릴 수도 있겠어
그녀는 내 혀 위에서 춤추지”
가사도, 창법도 신선하고 쿨한 곡
빌리 아일리시가 화자인 듯
'나'를 사슴이라고 표현하는 가사가 중간쯤 있다.
“그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나는 사슴
She's the headlights, I'm the deer.”
사슴은 달빛만으로 동공 충분히 열리는
민감한 시각 가졌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사슴에게 치명적 섬광탄,
순간적으로 눈멀게 한다.
따라서 가사를 이해하기 쉽게 고치면
“그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나는 눈먼 사슴”
한눈에 반한 첫 만남 장면 묘사일 수도 있고
둘 관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슴에게는 헤드라이트가 워낙 강렬하므로
순간 시각 잃고 얼어붙어 있다가
자동차에 치여 죽는 것이다.
로드킬이 연상될 만큼 강렬한 순간이라니.
하긴 인생은 길
우리 다 길에서 죽는 것
-그대의 소실점은 무엇인가?
헤드라이트와 사슴의 만남은
‘당황하여 얼어붙다’ 뜻 말고도
좋은 궁합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만나고 눈멀고 하나 되고 헤어지지 못하고
‘나’는 ‘너’ 죽이고
‘너’는 ‘나’ 살리는 것*
사랑
사랑은 둘 중 하나가 눈멀어야 시작된다.
다른 하나가 걷지 못한다면
기묘하고도 완전한 결합 이루어진다.
앞 보이지 않는 이가
다리 없는 이 업고 가는 것
업힌 이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 가리켜야 한다.
이런 장면 상징적이다.
사랑 묘사하는 합리적이고도 처연한 그림
우리 누구나 어디 한두 군데씩
부러지고 깨지지 않았던가.
아니라고?
완전하게 홀로 섰다고?
글쎄,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은
아쉬울 것 없어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는 자주 짝짓기 게임 속으로 들어가지만
수렁에 빠지지는 않는다.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너에게 목매겠느냐?
버리면 그뿐.”
장님은 방향 가리키는 사람 버릴 수 없다.
걷지 못하는 이도 업어주는 이 버릴 수 없다.
서로의 운명은 어느 순간 하나로 포개진다.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네 살이 내 살인지
내 피가 네 피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일심동체,
둘은 그렇게 서로를 일으켜주는 순례길 길동무다.
인류에게도 보이지 않는 앞길에
방향 제시하는 리더 필요하다.
흠결 있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뚝 일어선
길잡이 혹은 선장
그런 게 사랑이다.
수렁에 빠지는 게 사랑이다.
인류는 통째 사랑에 빠져 있다.
인류호의 선장은 미국 지도자만이 아니다.
우리 누구라도 어느 결정적인 순간
역사의 무대에 설 수 있다.
누가 언제 어느 순간 인류 운명 한 몸에 지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
만약 그대가 세월호 선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타이타닉호 선장은 또 어떻게 했나?
진짜 리더는 승객 먼저 구한다.
가짜는 저만 살려고 버둥거리며
배를 수렁에 빠뜨린다.
결국 먼 길 돌아 저도 수렁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 다 죽이고 나만 살 것이냐
내 죽을 것 각오하고
세상 살릴 길로 갈 것이냐.
미리 생각해 둬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 어떤 버튼 누를 것인가?
낭만이란 피 묻은 깃발
깃발은 거저 휘날리지 않는다.
죽을 줄 알면서도 혼신으로
수렁으로 걸어 들어갈 때
비로소 희미하게 그 자태 드러낸다.
그게 지성인의 낭만이다.
리더의 태도
인류호 선장의 기개다.
*‘나’는 ‘너’ 죽이고 ‘너’는 ‘나’ 살리는 것: 한 사람이 온전히 서기까지 얼마나 큰 인고가, 세월의 더께가 그를 감싸야했던가? 한 사람 성장하려면 온 우주의 보살핌 필요하다. 바로 우리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죽고 썩고 거름 되어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 땅과 대기와 태양 없이 홀로 선 나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