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나니, 내가 보였다

포항에서의 2년, 예기치 못한 일들

by 정석환

포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영일대해수욕장 너머로 보이는 포스코의 풍경이었다.
바다와 공장이 한 장면에 담겨 있는 모습은 포항이라는 도시가 가진 고유한 분위기였다.

그 장면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바다와 산업이 동시에 숨 쉬는 있는 도시라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 감정이 나중에 어떤 의미가 될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연구실 첫날은 더 낯설었다.
이미 직장생활을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나를 대하는 눈빛에는 조심스러움과 경계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나와 동갑인 연구실 선배도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어딘가 일정한 거리를 두는 느낌이 분명 있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강하게 들었다.

연구 주제를 정하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었지만, 실험 장비를 쓰는 일이나 소모품을 신청하는 일... 연구실의 하루가 돌아가는 거의 모든 과정은 선배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는 논문을 읽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자세를 낮추기로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연구실 청소를 하고, 나보다 나이가 더 어린 선배에게도 “제가 잘 몰라서요, 많이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런 태도가 도움이 되었는지 조금씩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배가 불쑥 말했다.
“니, 죽도시장 가봤나?”
처음이라고 하자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음 가득한 골목을 지나 작은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3만 원어치 적당히 섞어 달라고 하면 둘이 충분해.”
선배가 말했다.


사장님이 푸짐하게 내어준 회 한 접시 앞에서 우리는 대단치 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시장 특유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취기 속에서 선배와 나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연구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그 무렵이었다.
서로를 대하는 온도도, 말투도... 그동안 나를 둘러싼 긴장이 조금씩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물론, 고주망태가 된 날이 많아진 건 단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깊게 나눌 친구는 생각처럼 쉽게 생기지 않았다.
기숙사 복도를 걸을 때면 형광등 불빛만 길게 이어졌고, 문득 ‘나는 혼자다’라는 감정이 어둡게 올라왔다.


화면 캡처 2025-12-14 170157.jpg
KakaoTalk_20251214_165944276.jpg
대학원 합격 안내 메일(왼쪽)과 연구실에서의 모습(오른쪽)


그 무렵, 학부 시절 동아리 선배가 포항에서 성당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이웃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 성당에 따라 나가 보기로 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는 공간이었다.
여러 번 가다 보니 자연스레 세례까지 받았고, 성당에서 만난 친구들과 바닷가를 걸으며 나눈 대화는 그 시절의 나를 버티게 해 준 작은 위안이 되었다.


2년쯤 지났을 때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게 되었다.
철강대학원이었기 때문에, 박사과정으로 진학하거나 전공을 살려 포스코에 취업하는 길도 분명하게 열려 있었다.
지도교수님은 생활비를 더 지원해 줄 테니 박사과정에 오라고 하셨고, 함께 연구했던 포스코 박사님은 입사 의향이 있으면 추천서를 써주겠다고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추천서가 실제로 얼마나 힘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감사하게도 선택지가 여러 개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서울에 가고 싶었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며 내려왔던 만큼, 이제는 가까운 곳에서 더 자주 뵙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포항 생활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 무렵 서울의 한 공공기관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안정적인 곳에서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자연스레 지원했다.


그리고 어느 날, 최종 합격 문자가 왔다.
많은 사람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그 말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영일대 해수욕장 앞에서 느꼈던 그 묘한 감정이 기후를 다루는 내 진로와 언젠가 다시 닿게 될 줄은.

그렇게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선 생각지 못한 일들이 또 펼쳐졌다.

이전 01화25살, 모두가 말리던 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