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에서 벗어난 통합된 아이덴티티
1960년대 중반까지 뉴욕 지하철의 시각 환경은 극심한 혼란 상태였다. 서로 다른 운영회사 시절에 만들어진 표지판들이 뒤섞여 일관성이 없었고, 안내 스타일도 겹치고 모순되어 이용자 경험은 엉망이었다. 뉴욕 도시교통청 New York Transit Authority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6년 그래픽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 Massimo Vignelli와 그의 동료 밥 누어다 Bob Noorda를 영입하여 지하철 안내체계의 전면적인 시각 디자인 개편을 추진했다. 두 사람이 이끄는 유니마크 Unimark International는 방대한 지하철 시스템의 표지 및 노선 지도를 현대적으로 통합하는 과업을 맡았다. 그 결과 1970년 뉴욕시 교통청 그래픽 표준 매뉴얼 Graphics Standards Manual이 출판되고, 1972년에는 새로운 지하철 노선도가 도입되는 등 지하철 디자인에 통일성과 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마시모 비넬리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거장으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단순함과 기하학적 질서를 중시했다. 그는 디자인 작업에서 개념적인 명확성과 일관된 체계를 강조하며, 의미적으로 정확하고 전체적으로 일관되며 실용적으로 이해 가능할 것 –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지적으로 우아하며 무엇보다 시대를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철학은 뉴욕 지하철 프로젝트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비넬리와 함께 작업한 밥 누어다는 대중을 알쏭달쏭한 디자인으로 지루하게 하지 말라고 언급하며 지하철 디자인을 가능한 한 단순 명료하게 만들고자 했다. 헬베티카 서체를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만든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이 뉴욕 지하철 프로젝트일 정도로, 그들의 모더니즘적 접근은 당대 그래픽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넬리 설계 원칙의 핵심은 정보의 단순화였다. 디자이너 팀은 수백만 이용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디에서 찾는지를 연구한 뒤,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2년에 공개된 새 지하철 노선도는 이 철학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었다. 지상 지형이나 세부 배경 정보는 모두 생략하고, 노선의 흐름과 환승 관계, 그리고 역 위치만을 명확히 보여주도록 의도한 것이다. 비넬리는 승객이 역에서 역으로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도록 안내하는 개념이라 설명하며, 각 정거장을 점으로 표시하고 그 외 요소는 넣지 않았다. 그는 이를 두고 “선과 점, 그게 전부다. 점이 없으면 정거장도 없다”*고 간명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노선도에는 공원의 형태나 강의 모양조차 나타나지 않았고, 역들 간의 거리는 모두 동일하게 인식하여 그려졌다. 오직 지하철 운행에 필요한 정보만 남긴 이러한 지도 디자인은 깔끔함과 가독성 측면에서 디자인 애호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72년 도입된 비넬리의 뉴욕 지하철 노선도는 현실 지형을 생략하고 노선과 역 정보만 담은 다이어그램 형태로 그려졌다. 비넬리는 1933년 런던 지하철 지도를 디자인한 해리 백 Harry Beck의 방식을 따라 뉴욕 지하철 수직과 수평 또는 45도 각도로 표현되었고, 역들은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점으로 표시되었다. 이러한 간결한 표기법은 복잡한 지하철망을 추상화하여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비넬리의 디자인 시스템에서 타이포그래피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지하철 환경에서는 어떤 장식적 서체보다도 단순하고 굵은 산세리프체가 적합하다고 보았다. 초기 연구 단계에서 뉴욕에 막 보급되기 시작한 헬베티카의 중립적이고 뛰어난 가독성에 주목하여, 모든 표지판과 지도에 한결같이 이 서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헬베티카 폰트가 미국에 널리 퍼지지 않아 시험 제작 때는 먼저 Standard 서체를 썼다가 최종안에서 헬베티카로 교체했다고 한다. 이렇듯 한 가지 글꼴로 통일한 디자인은 뉴욕 전역의 지하철 시각 언어를 일관되게 만들어 주었다.
유니마크 팀이 설계한 뉴욕 지하철 역명 표지판의 예시. 모든 역명은 동일한 무산세리프 글꼴(헬베티카)로 표기되고, 노선 표기에는 색상이 입혀진 원형 기호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일관된 디자인 요소 덕분에 어느 역을 가더라도 익숙한 형태로 정보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넬리는 디자인에서의 일관성을 특히 강조하여, 지하철 그래픽 요소의 글꼴 종류와 크기를 가능한 한 제한했다. 그는 사용하는 서체 종류가 적을수록 좋고, 글자 크기 종류가 적을수록 더 좋다며 스위스 스타일의 엄격한 타이포그래피 접근을 적용했다. 실제로 유니마크 팀은 지하철 표지판에 격자 시스템 사고를 도입하여 안내판의 규격과 배치를 모듈화 했다. 과거에는 공간에 맞춰 각기 다르게 제작되던 역명 표지판을 세 가지 표준 크기로 정형화하고, 각 규격이 이전 것의 2배씩 되도록 설계하여 전체 시스템에 일관된 비례를 부여했다. 이러한 격자 기반 설계는 지하철 노선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뉴욕 지하철 노선에 색상 코드를 부여한 것도 이 디자인 시스템의 중요한 성과였다. 기존 지하철 지도는 IRT, BMT, IND 옛 노선망별로 3가지 색만 사용하여 노선을 표시했는데, 이러한 제한된 팔레트는 복잡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어려웠다. 비넬리와 그의 팀은 각 지하철 노선에 뚜렷한 고유 색상을 지정하는 색상 체계를 구축했고, 1972년 새 노선도는 처음으로 모든 주요 노선을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새로운 팔레트는 이후 뉴욕 지하철의 시각적 상징이 될 만큼 혁신적이었다. 예를 들어 지도상 빨간색은 1·2·3호선, 녹색은 4·5·6호선, 파란색은 A·C·E선 등으로 정해져 승객들은 색깔만 보고도 어느 계열의 열차인지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역 구내의 안내 사인에도 동일한 색상이 반영되어, 노선 번호나 문자를 나타내는 원형 아이콘에 해당 노선의 색을 채워 넣었다. 텍스트 대신 색과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는 이 방법은 복잡한 환승 안내를 단순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디자인 전문가들은 비넬리가 만든 통일된 색상과 아이콘 시스템이 지하철 안내 디자인에 명확한 시각 언어를 부여한 뛰어난 사례라고 평가한다. 선명하고 대비되는 색상 덕분에 이용자들은 복잡한 노선망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뉴욕 지하철 노선도의 기본으로 계승되고 있다.
비넬리가 주도한 디자인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혼란스러운 환경에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1940년대 이후 형식적으로 하나로 통합된 뉴욕 지하철에는 여전히 예전 회사별 다른 스타일과 용어가 뒤섞여 남아 있어 이용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역에서는 임시로 벽에 붙인 종이쪽지가 역 안내의 전부인 경우도 있었다. 유니마크 팀은 먼저 지하철 승객들의 동선을 철저히 조사하여, 어떤 지점에서 어떤 안내가 필요한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 그리고 결정이 이루어지는 지점(갈림길 등)에서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제시하고, 너무 이르거나 늦지 않게 안내한다는 원칙을 세워 표지판 배치와 내용을 체계화했다. 이러한 사용자 중심의 체계적 설계를 통해 각 역사 내 표지판의 위치와 메시지가 표준화되었고,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표시는 과감히 제거되었다. 그 결과 지하철 시스템 전반에 걸쳐 하나의 일관된 시각 언어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승객들은 어느 역에 있든 동일한 그래픽 규칙에 따른 안내표지(동일한 글꼴, 색상, 기호 등)를 접하게 되었고, 이전 시대의 뒤죽박죽이던 표지판들은 질서 정연한 디자인으로 대체되었다. 뉴욕 지하철의 안내체계는 비넬리의 모더니즘 철학 덕분에 혼돈에서 벗어나 통합된 아이덴티티를 갖추게 된 것이다.
마시모 비넬리가 뉴욕 지하철에 도입한 모더니즘 디자인 시스템은 승객들의 이용 경험을 획기적으로 향상했다. 표준화된 안내 디자인 덕분에 처음 지하철을 접하는 사람이나 외국인 관광객들도 직관적으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 뉴욕은 세계 박람회 등으로 연간 수천만 명의 방문객이 몰려들었는데, 새로운 통일 디자인은 이러한 초보 이용자들에게도 명쾌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한편 1972년 노선도는 첫 공개 당시 지리 정보가 생략된 점 때문에 일부 뉴욕 주민들에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비넬리의 디자인 원칙들은 시간이 지나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정보의 가독성과 일관성 측면에서 뉴욕 지하철 안내 체계를 한 단계 발전시켜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넬리가 만든 표지판 시스템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뉴욕 지하철의 기반으로 남아있다. 모든 역의 안내 글자는 여전히 헬베티카로 통일되어 있으며, 노선 색상과 아이콘 체계 역시 그의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70년대 후반 승객 요구에 따라 지하철 지도는 지리적 요소를 일부 되돌린 형태로 개편되었지만, 비넬리의 지도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 MTA는 비넬리의 디자인을 재조명하여 디지털 서비스에 이 지도를 다시 도입했고, 2017년 Second Avenue Subway 개통 기념 지도도 비넬리 스타일로 제작하였다. 뉴욕 현대미술관 MoMA은 비넬리의 1972년 노선도를 디자인 클래식으로 선정하여 소장하고 있으며, 1970년 그래픽 표준 매뉴얼은 2014년 복간되어 디자인사에서 그 가치를 재조명받았다. 이렇듯 비넬리가 혼돈의 뉴욕 지하철에 가져온 명료함과 통일성은 도시의 사용자 경험을 혁신적으로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보 디자인이 공공 환경의 문제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남아 있다.
출처
Colby Mugrabi. (7 September 2018). The Subway Map. www.minniemuse.com
Amy Plitt. (10 January 2017). Massimo Vignelli's enduring NYC subway legacy. ny.curbed.com
Gary Hustwit. (24 March). A Rare Interview With Graphic Design Legend Massimo Vignelli. www.fastcompany.com
Allen Hillery. (26 July 2019). How Vignelli’s Design Still Influences NYC’s Subway Maps Today. medium.com
New York Transit Museum. Towards a Better Way: The “Vignelli” Map at 50. www.nytransitmuseu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