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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당나귀 Jun 10. 2024

[책을 읽고] 나의 사랑, 매기

연애는 언제 끝날까

“그때 아줌마가 밀차에 순댓국 두 그릇을 얹어 주방에서 밀고 나왔다. 그리고 우리 앞에 한 그릇씩 내려놓았다. 매기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러니까 자기에게 주려는 것이 정말 진실로 모욕인가, 상처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의 어딘가 두렵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의혹에 찬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마음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네가 내게 던지려는 것이 그런 볼이라면 가만히 받고만 있지는 않겠어, 하는 결의를 숨기지 않는 거친 동작으로 밥을 말았다. 평소라면 분명히 덜어냈을 양념을 자기도 모르게 다 풀어서 붉은 국물을 만든 다음에 매워서 몇 숟가락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안 먹어? 왜, 안 먹혀?”

“안 먹혀.”

안 먹힌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쓰였지만 그런 염려는 이내 뜨거운 밥에서 나는 한김처럼 사라져버렸다.

“왜, 야, 맛없니? 우리한텐 이런 음식이 딱이야. 우린 그냥 이런 거 먹고 미사리에서 데이트하고 모텔에서 대실해서 자고 그러는 거야. 원래 내연관계는 그런 거야.” ”



“매기는 정종 한 병을 시켜놓고 혼자 남아 복껍질 무침에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내가 우리 관계를 비로소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리에 늦었고 친구마저 가버렸는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는 중에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곧 가겠다고 초조하게 기별했을 때도 괜찮아, 무리하지는 마, 라고 했던 터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다. 매기는 정종을 계속 마시면서 배고플 텐데 밥을 시키라고 했다. 내가 10000원짜리 복국을 주문하려고 하자 자꾸 18000원짜리 밀복국을 먹으라고 했다.

“이왕이면 좋은 걸 먹어, 좋은 복국을 먹어, 재훈아.”

하지만 나는 매기를 만나면서도 돈 문제에는 민감했고 기분이다 싶어서 돈을 함부로 쓰거나 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으므로 매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매기는 나와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마치 술주정을 하듯이 왜 밀복국을 먹지 않았느냐고 탓을 했다. 소주 두 병을 마셔도 그냥 좀 기분좋게 박수나 칠 뿐 주정이 없는 애였는데, 대화가 좀 흐르다 보면 어느새 왜 밀복을 안 먹었어, 왜, 안 먹었어 하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럽고 떨떠름했지만 다른 얘기도 아니고 그냥 그 좋은 밀복국을 안 먹느냐는 것이니까 좋게 넘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광장의 시간이었다. 출판사 동료들과 함께 야근이 끝나고 광화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해서 세상이 바뀐다면 매기와 나의 관계에도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했던 오늘은 단지 긴 현재일 뿐인 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애인이 되어 제주에서 날아올 매기를 기다렸다가 매기는 날개를 먹지 않으니까 그건 내가 먹고 저녁이면 한강으로 나가서 반보씩 간격을 두고 산책 아닌 산책을 함께하고 매기가 가고 나면 조용히 그 일급비밀의 메신저가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의 일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집이 있고 먹어야 할 저녁이 있고 내일을 위해 오늘 확보되어야 할 밤의 숙면이 있다는 것, 매기 역시 내가 보지 못하는 어느 영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장바구니 위로 어느 푸성귀의 푸른 잎이 보일 때마다, 비닐봉지를 묵직하게 누르는 야채의 부피감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심지어 당근도 자기 삶을 감당하고 있다고.”







김금희가 쓴 남자 주인공들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맥도날드에서 후배에게 가장 싼 버거를 사주면서도 아까워하면서 오늘도 나를 좋아하냐고 묻는 남자 주인공, 그리고 만 팔천원짜리 비싼 밀복국을 먹으라는대도 팔천원이 아까워 만원짜리 일반 복국을 먹는 남자 주인공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나도 종종 그렇기 때문이다. (아니면 항상 그런가?) 맥도날드와 팔천원 더 비싼 복어국이, 왜 하필 삼천원도 아니고 팔천원일까, 망설이게 하는 현실적인 묘사다. 김금희가 쓴 남자 주인공은 이렇게 흔하다고 생각될 만큼 치밀하게 짜였다.


<나의 사랑, 매기>는 <너무 한낮의 연애> 후로 정말 재미있게 읽은 김금희의 소설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 맥도날드가 있었다면 이 소설에는 ‘아침식사 가능’ 순댓국집이 있다. 순댓국집에서 재훈은 우리같은 불륜 커플한테는 요즘 유행하는 브런치가 아니라 순댓국이 어울린다고 매기에게 퍼붓는다. 재훈이 묻고 싶었던 건 그 관계의 지속가능성이지만 정작 물었던 건 너는 좋은 엄마냐, 불륜하면서 순댓국은 안 넘어가냐이다. 또 아이러니하게 이 순댓국집에서 재훈 별명을 정한다. 매기라고.


매기와 재훈은 이미 끝이 정해진 연애를 하는 것 같지만 어디가 연애의 끝이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연애는 어디서 끝나는지 생각해봤다. 매기가 둘만의 관계에 제일 친한 친구인 제삼자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복어국집에서 재훈은 일 때문에 왕창 늦어버린다. 그 장면에서 매기가 왜 늦게왔냐며 화내지 않았다는 게 이별의 신호 같다. 그러면서도 매기는 자꾸 몸에 좋은 밀복국을 먹으라고 권한다. 이제 너와 싸울 시간과 마음의 여유는 없으나 너는 건강하고 몸에 좋은 걸 먹으면서 잘 지내라는 얘기 아닐까?


김금희 작가와 ‘망한 연애 올림피아드’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내 엑스는 복어국 집에서 내가 좋은 거 먹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결국 그 팔천원이 아까워서 싼걸 먹더라, 우리는 맨날 맥도날드에서 제일 싼 버거만 먹었어,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 그거 난데?’ 하면서 난처해질 것 같다. 그래서 망한 연애 올림피아드는 조용히 끝나버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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