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 비자 받기와 험난한 독일 관료주의
독일에 산 지 6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몇 번이나 비자 연장을 신청했나 생각해보니 한 4번정도 외국인청에 간 것 같다. 독일은 학비는 없지만 학생 비자를 받으려면 증명해야하는 통장 잔고 금액이 꽤 어마어마하다. 한달 생활비 800유로 기준 1년치, 13000유로 이상이 있으면 보통 2년 정도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나는 학업이 끝나 18개월간 신청할 수 있는 구직 비자를 신청하러 갔다.
작년 10월에 한번 오라고 우편을 받았지만 이미 임시비자를 신청했을 때였다. 졸업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면 임시비자를 신청하는 걸 추천한다. 임시비자는 이전 비자와 효력은 똑같지만 증명해야하는 서류가 필요 없고 당일에 받을 수 있다. 게다가 비자 신청비가 다른 비자는 100유로에 비해 13유로 정도로 저렴하다.
인턴은 시작하고, 비자는 끝나가고 마음이 급했을 때 외국인청 앞에 새벽같이 줄을 섰다. 외국인청 앞은 항상 줄 서있는 외국인들로 가득하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동병상련의 마음이 든다. 내 앞에 1명만 있어도 10분 이상 더 기다려야 하므로 내 앞에 10명이 있다면 100분 정도를 대기표를 뽑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청이 문 여는 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한 적이 있다. 6시정도에 일어나 7시에 도착했다. 날씨는 아직 춥고 해도 안 떴다. 외국인청 앞에서 빨갛게 해가 뜨는 걸 봤다.
이번에는 Termin(약속)이 정해져 있었기에 안심하고 여유롭게 도착했다. 공항 검문처럼 가방 검사를 마치고 1층으로 가라고 해서 올라갔다. 독일식 1층은 한국식 2층이다. 각 방 앞의 이름을 둘러봐도 나에게 이메일을 보낸 A 담당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앉아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앉아있으면 불러줄 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8시 약속이 8시 20분을 향해가는데 계속 기다릴 수 없었다. 공작새가 우왕좌왕 돌아다니니 다른 직원이 A 담당자는 1층이 아니라 2층에 있다고 했다.
1층으로 가라고 했던 security 직원의 가짜 뉴스에 고개를 저으며 A 담당자를 찾았다. 그는 대뜸 ‚8시 약속인데 왜 20분이나 늦었냐‘라고 했다. 아니 1층에서 기다렸다고요?! 그랬더니 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 약속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분명히 이날 8시에 오라는 이메일을 받았는데, 내 약속이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사진을 가져왔냐고 물었다.
보통 외국인청 약속은 (2024년의 한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이) 우편으로 온다… 이메일만 받고 우편은 받지 않아서 정확히 뭘 가져와야 하는지 체크하지 않았다. 아뿔싸! 너무 오래전에 비자를 받았나보다. 외국인청 1층에는 나처럼 사진을 빠뜨린 사람을 위해서 사진 찍는 곳을 마련해두었다. 다른 서류는 다 준비했으니 1층으로 빨리 가서 사진 찍고 오면 안되겠냐고 물으니 독일식으로 얄짤 없이 안된다고 했다. 그럼 언제 다시 비자 약속을 받을 수 있냐고 물으니 나중에 확인해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더워진 나는 공작새와 긴급 회의를 했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설 것이냐 한번 더 기회를 노려볼 것이냐.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몽롱한 채로 하루를 보내는 걸 두 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1층에서 사진을 찍고 한번 더 우겨볼 생각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독일어도 이해가 안 됐다. 사진 찍는 기계에는 양손 검지와 엄지 지문을 찍어야 했다. 독일에 내 지문을 남기는 게 참 오묘한 느낌이다. 평소에는 프라이버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외국인한테는 온갖 지문 요구를 한다.
아무튼 빨리 사진을 아무렇게나 찍고 두꺼운 코트를 들고 2층(한국 3층)까지 올라간 나는 A 담당자 앞을 기웃거렸다. 그가 호통칠까 두려워 공작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예상대로 그는 상황을 봐주지 않고 오늘은 끝난 거라고 했다.
하지만 사진까지 찍었는데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나는 이메일에 이름이 적힌 B 담당자에게 가보기로 했다. 마치 1층에서 잘못 기다리다가 막 도착한 사람처럼 도움을 구해볼 작정이었다. 공작새는 A 담당자가 약속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괜찮지 않겠냐고 했지만 나는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 패배를 인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진은 인쇄가 나오지도 않는데 4.5유로였다. 최악의 상황은 내가 A 담당자와 B 담당자 두 명한테서 두 개의 약속을 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빠른 약속을 택하고 다른 약속은 거절하면 된다.
B 담당자도 다른 약속들로 바쁜지 나는 사무실을 기웃거리다가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도 내 약속을 시스템 안에서 검색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러니까, 내 약속은 오늘 8시가 아니라 9시 5분이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담당자한테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 뒤로 밀린 본인의 약속을 해결하며 나한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ich gucke, was ich für Sie tun kann‘이라는 말이 달콤했다. 나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지 확인해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몇 번의 전화 끝에 C 담당자에게 가라고 얘기해줬다. 감사합니다… 외국인청에서 도움을 받다니 감동 실화였다.
우리는 C 담당자가 A 담당자와 다른 사무실에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A 담당자가 또 호통을 칠 수도 있었고 왜 자꾸 귀찮게하냐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잘못은 사진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고 그것보다 큰 외국인청의 잘못은 내 약속을 유령 약속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잘못은 1:1이 되었다. 공작새가 들어갈 때 C 담당자가 A 담당자와 다른 사무실인 것 같다고 좋아했는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듯이 그들은 한 사무실에 있었다. 문이 두 개인.
C 담당자는 방금 전에 내 동료에게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공작새가 재빠르게 ‚우리가 확인 했는데 사실 우리 약속은 오늘 잘못 잡혀있던 거였다‘라고 대답했다. C 담당자에게 모든 서류를 맡기고 한숨 돌렸다. 아직도 겨드랑이에 땀은 나고 있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외국인 청이기 때문이다. C 담당자는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오래된 서류들을 다시 요청하고 비자 받는 건 어렵지 않게 흘러갔다. A 담당자는 자신의 일이 줄어서 기뻤던 것인지 꽤나 협조적으로 나왔다. ‚그 서류들 다 내가 스캔해서 시스템에 올려놨어.‘ C 담당자가 몇 년 전 서울에 왔다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녀가 서울에서 봤던 사람들은 자신의 직장인 외국인청에 비자를 신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보였을까 조금 씁쓸했다. 그리고 다른 분쟁 국가 출신 사람들은 담당자가 자기 나라에 와봤고 그 경험이 어땠고 하는 스몰토크로 긴장을 푸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 적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이 작고 답답했는데 해외에서 한국의 인기가 커지고 케이팝이나 k-드라마 인기가 높아질수록 엉뚱한 데서 혜택을 받는다.
C 담당자는 매우 친절했고 나는 마지막 관문인 ‚돈 내고 오기‘만 통과하면 됐다. 다시 지상층으로 3층을 두꺼운 코트를 싸들고 걸어 내려갔다. 아니, 아마 공작새가 내 코트, 자전거 헬멧, 자기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지상층에는 아까는 밖에서 줄 서있고 안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지루한 외국인들이 가득했다. 나도 그들 사이로 들어가 돈을 내는데도 기다려야하는 외국인으로 녹아들었다. 공작새가 1층으로 가라고 했는데 2층이었다는 게 너무 어이없었다고, 정말 말을 다 믿으면 안되고 싸우고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백인 독일인은 시청에 앉아있으면 불러주지만 외국인은 자기가 알아서 물어물어 찾아가야 돼‘라고 했다.
100유로가 넘는 큰 금액을 뼈아프게 결재하고 다시 C 담당자에게 갔다. 그녀는 쾌활하게 여러 질문에 대답해줬다. 그리고 내가 구직 비자 18개월을 다 안쓰면 석사 이후에 남은 기간을 다시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공작새가 ‚내가 대신 비자카드 가지러 올 수 있냐고 물어볼까‘라고 속삭였는데 C 담당자는 그걸 듣고 Vollmacht (대충 이 사람이 내 대리인이라는 내용)까지 인쇄해 주었다. 독일 외국인청에서 이런 친절을 받다니 아주 감사했다…
아무튼 나는 비자를 스스로 쟁취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3층 계단을 내려갔다. 언제 비자 약속이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래서 일을 시작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다시 새벽 6시에 외국인 청에 나와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라는 속담에 큰 도움을 받아 무사히 졸업도 하고 비자도 원래대로 받았다.
한번도 외국인청에서 내 약속이 사라져버리거나 서류를 잘못 가져온다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청이 이렇게 허술해도 되나 싶었다. 그리고 아주 카프카적인 경험이었다. ‚카프카의 <성> 같았어‘ 공작새가 말했다. 오라는 고지를 받아서 성에 가겠다는데 성은 온데간데 없고 수박 겉핥기만 하는 얘기다. 담당자를 만나려는데 이 담당자도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하고 저 담당자도 자기는 바쁘다고 한다. <재판>에서 주인공은 그 불확실성과 알 수 없는 관료주의와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는다. 나는 그저 비자 신청을 앞으로 더 안해도 되는 외국인이고 싶다… 관료주의와 싸우다 죽고 싶지는 않아요.
공작새가 ‚가끔씩 결혼하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가끔씩 거짓말은 좋아요‘라고 말하려다가 무슨 연관인지 결혼이 튀어나왔다. 나도 가끔씩 거짓말처럼 가끔씩의 결혼이 허용되는 것이 찬성이다. 법적 구속력이 없고 사회적 성역할과 엄마로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 하나 없이 비자청 안에서만 ‚가끔 결혼‘이 허용되고 비자청을 나오면 결혼이 온데간데 없어지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독일에서 열심히 내 살길 찾아가고 칼을 뽑으면 무라도 자르는데 배우자 비자를 받는 것은 내 존재 이유 자체가 타인에게 종속되는 것 같다. 심지어 배우자 비자는 3년 한번 주고 3년 이후에도 함께이면 영주권을 준다. ‚너희 사랑이 3년이나 가겠어‘라는 것 같아서 왠지 기분 나쁘다. 공작새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독일에 있는 허락을 받는 건 싫다. 나는 내 선택으로 독일에 있는 것이고, 독일이 내 존재 하나만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도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 나도 ‚흥‘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