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집에 오자마자 짐을 싸기 시작한다. 니트, 무스탕, 양털 재킷, 스키복, 털모자, 털장갑, 양말을 챙긴다. 부피가 커서 옷이 캐리어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체중을 실어서 옷을 누른다. 납작해진 옷들을 캐리어에 욱여넣고는 힘겹게 지퍼를 잠근다. 그러고선 내일 입을 코트와 바지는 잘 보이도록 옷장에 걸어 둔다. 중국에 있는 공항에 잠시 경유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 7일에서 8일 동안 여행하는 것이지만, 여행을 편하게 다니기 위해서 짐을 줄이기로 했다. 옷을 가방에 다 넣고 국제선 기내 반입 금지 물품을 인터넷에 검색한다. ‘개별 용기당 100ml 이하로, 1인당 1L 비닐 지퍼백 1개에 한해 반입 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태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태우가 예를 들면서 이 문구의 의미를 설명한다. 화장품들을 옮겨 담을 통을 사지 않았기에 나는 태우에게 수하물을 맡기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숙소 예약 확인서를 넣은 파일을 가방에 넣는다. 짐을 싸고 비행기 온라인 체크인을 한다. 설레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부모 없이 친구와 가는 해외여행이자, 첫 북유럽 여행이다. 미국이나 아시아 쪽 나라 몇몇은 어릴 때 부모의 통제하에서 가봤지만 북유럽은 처음 가보는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에게 아쉬움을 가져다주지만, 처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처음이라서 설레었다.
여행할 때만큼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겠다는 패기 있는 다짐을 한다. 짐을 다 싸고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30분이다. 침대로 달려가서 눕고는 이불을 덮는다. 배달 앱을 들어가서 김치찌개를 시킨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다. 그동안 얼마나 바라 왔던 순간인가. 여유롭다 못해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심심한 순간. 그 심심함으로부터 나는 평온함을 느낀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나가서 음식을 가져오고는 포장을 뜯는다. 좋아하는 영화를 틀고 음식을 먹는다. 집중해서 영화를 보다 보니 벌써 1시간이 지났다. 대학 입시를 하고 있었을 나라면 죄책감부터 느끼고는 곧바로 공부를 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입시가 끝났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그렇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밥 먹는 것을 계속한다.
입시를 하고 있을 때와 달라진 점은 이제는 밥을 먹으면서 영화나 유튜브를 보는 순간이 그때만큼 간절하지 않고, 재밌지 않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빠르게 적응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노는 것에도 적응이 되어서 이 세상에 재미를 느낄만한 것이 없어지면 어쩌지라는 무의미한 걱정을 해댄다.
나는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고는 분리수거를 한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천천히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그동안은 빨리 씻어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있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매일 쓰던 샴푸 뒤에 못 보던 트리트먼트가 있다. 사실 항상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늘 알게 되었다. 샴푸를 헹궈낸 후 트리트먼트를 머리끝에만 꼼꼼하게 발라준다. 전보다 머릿결이 좋아진 듯하다. 몸 구석구석을 수건으로 닦는다. 머리에 물기가 없어질 때까지 꼼꼼하게 머리를 털어 준다. 문밖에서 비밀번호를 치는 소리가 난다. 퇴근하고 온 거겠지. 나는 부모의 방문 소리가 들릴 때까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야 나는 내 방으로 서둘러 간다. 문을 닫고 화장품을 바른다. 전보다 화장품이 늘었다. 스킨과 로션, 선크림만 담겨 있던 조촐한 내 화장품 바구니에는 미백 앰플, 모공 앰플, 재생크림이 추가로 들어 있다. 순서대로 화장품을 바르고서는 침대에 눕는다. 넷플릭스 신작에서 볼 만한 것을 찾는다. 주방으로 가서 과자를 찾는다. 양치를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사실에 과자를 먹을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결정한다. 과자와 콜라를 가져온다. 평소와는 다르게 콜라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 채로 마신다. 다 먹은 과자와 콜라를 식탁 위에 두고 알람을 맞춘다. 그리고는 편한 자세로 고쳐 눕는다.
띠리리 띠리릭.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난다. 놀라서 황급히 깬다. 시간을 보니 5시 40분이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7시 40분이다. 눈을 뜨지도 못한 채로 서둘러 세수를 한다. 면바지와 니트, 코트를 서둘러 입고 가방을 챙긴다. 다시 화장실로 가서 클렌징 폼을 챙기고는 가방에 서둘러 넣는다. 양말을 신고 놓고 가는 것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다. 온라인 지도를 보니 공항버스는 5분 뒤 도착이다. 서둘러 집을 나선다. 가방을 멘 채로 달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오는 버스는 점점 더 나와 가까워지다가 나와 나란히 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앞 횡단보도에서 빨간색 불이 켜진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고 버스는 정지선 앞에 멈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어가서 카드를 꺼낸다.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고는 태우에게 전화를 건다.
“태우야 나 지금 타서 한 7시 5분쯤 도착 예정이야. 최대한 빨리 갈게. 너 먼저 입국심사받고 탑승구에 가 있어.”
“알겠어 늦으면 안 돼.”
전화를 끊고는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계속 내려오고 눈 주위가 뻐근하다. 눈을 감고 눈알을 이리저리 돌린다. 머리와 어깨를 풀기 위해서 계속해서 돌려준다. 노래를 틀고 창문을 바라본다. 새벽 일찍부터 나와 있는 사람이 꽤 많은 것에 놀란다. 누군가는 운전을 하여 직장으로 출근하고, 누군가는 조깅을 하며 땀을 흘린다. 그들의 얼굴은, 느지막이 일어나서 곧바로 출근을 하러 가는 사람들보다 더 생기 있어 보인다.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열심히 살도록 하는, 그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는 빛나고 있는 서울의 고층 건물들 사이를 지나서 인천 바다에 다다른다. 하늘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잠시 뒤에 동전 만한 크기의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푸른빛의 하늘과, 붉은빛으로 물든 태양 주변 하늘 사이에 경계선이 만들어진다. 삶은 무척이나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버스 안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곧 인천 공항 제1 여객 터미널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나는 놓고 내리는 것이 없도록 다시 한번 짐을 확인한다. 태우로부터 도착했냐는 메시지가 와 있다. 지금 내린다고 답장을 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가방에서 여권을 서둘러 꺼내고서는 출국심사장으로 달려간다. 형식적이지만 꼭 필요한 절차가 진행된다. 여권을 스캔하고, 소지품들을 검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 수사에서 쓸 법한 도구를 가지고 몸수색을 한다.
어떠한 공을 칠 때 쓰는 라켓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괜히 무언가가 걸려서 사이렌이 울릴까 봐 걱정한다. 몸수색이 끝나자마자 탑승구로 달려간다. 눈앞에 Gate. 122가 보인다. 시계를 보니 7시 43분이다. 다행히 아직 탑승 중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태우를 찾는다. 탑승 줄에서 태우가 보인다. 태우 옆으로 가서 줄을 선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첫 여행부터 스펙터클 하네.”
태우가 웃으면서 말한다.
밖을 보니 붉은빛으로 물든 구름들은 사라지고 푸른색 하늘과 하얀 구름만이 보인다. 비행기가 가득 찬 공항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잠시 멍하니 쳐다본다. 태우와 나는 승무원의 안내를 따라 비행기 안으로 들어간다.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주는 승무원들이 예뻐 보인다. 비행기 안에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두들 표정이 밝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나의 마음도 더욱 들뜬다.
승무원들의 안내가 끝난 후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비행기는 곧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활주로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비행기의 창문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내려다본다.
커 보이기만 했던 것들도 하늘 위에서 보니 작게만 보인다. 비행기는 점점 올라가 구름 사이를 지나기 시작한다. 솜사탕처럼 뭉쳐 있던 구름이 비행기에 부딪쳐서 이리저리 흩어진다. 구름 사이로 살짝씩 보이는 건물들이 작아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늘에서 보니 건물도 이렇게 작은데,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나는 목이 아파 오는 것 같아서 건물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둔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흰색과 푸른색의 색 조합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비행기는 이제 구름을 통과하여 티끌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을 지난다. 하얀 구름을 보며 스웨덴에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햇빛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나는 창문을 내린다.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기내식 메뉴를 주문받는다. 나와 태우는 치킨라이스를 선택했다. 항상 비행기에서 먹는 음식은 왠지 더욱 맛있는 것 같다. 음식의 맛에 현재 있는 장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나는 치킨과 밥을 모두 먹고 함께 나온 빵과 과일, 음료를 빠르게 먹는다. 배를 채우자 기분이 약간은 더 좋아졌다. 또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눈이 뻐근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착륙 준비를 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비몽 사몽한 상태로 의자를 당기고 창문 덮개를 올린다. 건물이 차차 보이는 듯하더니 압도적인 크기의 공항이 보인다. 트로피 모양처럼 생긴 일련의 차도 위로 수많은 차들이 지나가고 차도 옆에는 엄청 난 크기의 비행장이 보인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비행기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더니, 큰 진동을 일으키며 착륙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렸다가 비행기 밖으로 빠져나간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가득 껴 있다. 흐리고 뿌옇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보던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그립다. 태우와 나는 환승 대기시간이 5시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우리는 공항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길을 걷다 보니 중국의 전통적인 양식의 기와집이 보인다. 돌로 둘러 쌓인 작은 연못에는 초록잎을 가진 식물이 가득하다.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기와집까지 이어주는 작은 돌다리가 보인다. 기와집의 입구에는 절벽이 그려진 종이로 불빛을 감싼,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조명이 있다. 조명 바닥에 붙은 붉은색의 실 뭉텅이가 눈에 띈다. 문득 옛 선비들이 이곳처럼 평화로운 장소를 보고, 경쟁과 시기 질투가 만연한 속세에서 벗어나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학교 시험을 위해서 시의 내용을 외울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돌다리를 건너서 보니 입구 옆 흰색의 벽지에 한자로 쓰인 나무판자가 붙어 있다. 번역기를 돌려 볼까 생각하지만 그만둔다. 기와집 안에는 역사 교과서에서 본 듯한, 글씨가 적힌 종이들과 거북이의 배딱지 위에 글씨를 쓴 갑골문이 있었다.
우리는 구경을 다 하고 식당을 찾으러 간다. 지나가는 길에 또 붉은색 정자와 연못을 발견한다. 공항의 현대적인 모습과 섞인 옛 모습이 이상하면서도 조화롭다.
우리는 안내 지도를 찾고, 어느 식당으로 갈지를 고민한다. 나는 중식을 먹고 싶었고, 태우는 양식을 먹고 싶다고 한다.
여행 경비를 아껴야 하는 우리는 결국 KFC로 간다. 꽤 오랫동안 고민해서 결정한 곳이 KFC라는 것에 우리는 웃음이 터진다. 치킨 버거를 시켜서 먹는다. 한 입 베어 문다. 터지는 듯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찬다.
감자튀김까지 다 먹은 뒤에 시간을 보니 출발 시간까지 1시간이 남아 있다. 우리는 탑승구를 확인하고는 의자에 앉는다. 길게만 느껴지던 1시간이 지나고 탑승이 시작된다. 이번에도 밝은 웃음으로 맞이해 주는 승무원과 지쳐 있는 우리의 모습이 대비되어 보인다. 나는 티켓에 나와 있는 좌석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이륙한 지도 모른 채로 잠에 빠져든다.
눈에 들어오는 밝은 빛에 일어나 보니 비행기는 지고 있는 해로 인해서 다홍빛으로 물든 구름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자신의 빛을 마음껏 퍼뜨리고 있다. 시계를 보니 2시 30분이다.
아 지금 꿈을 꾸는 거구나. 2시 30분에 해가 지고 있다니. 이번 꿈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것은 시간뿐만이 아니라 풍경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는다. 눈이 쌓여 있는 산들과 논들은 파우더를 묻힌 듯 새하얗다. 마치 산타와 루돌프가 살 것만 같다. 옆을 보니 태우는 잠들어 있다. 잠시 뒤에 영어로 착륙 예정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승무원들이 기내를 돌아다니면서 의자를 당기고 창문 덮개를 내리라는 권유를 한다. 볼을 세게 잡아 본다. 아프고 얼얼하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다. 공항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눈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비행기 날개의 부분 부분이 위로 펼쳐져서 저항력을 만든다.
요란한 충돌음을 내면서 비행기가 땅에 착륙한다. 비행기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핸드폰을 킨다. e 심을 활성화하고 구글에 ‘스웨덴 1월 일몰 시간’이라고 검색한다. 약 3시. 3시라니. 겨울이어도 일몰이 3시라니.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구의 신비에 또 한 번 놀란다. 지금은 아마 꿈이 아닌 듯하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승객들이 자신들의 짐을 꺼내려고 일어난다. 우리는 앞쪽 좌석의 사람들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온다. 우리는 미리 대기되어 있는 공항버스를 탄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일몰이 아름답다. 일출과 함께 출발하여 일몰과 함께 도착하는 여행이라니. 나의 첫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공항 안으로 들어오니 해는 사라지고 없다. 해가 남기고 간 핑크빛 구름들만이 남아 있다.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운 하늘의 색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으로 그 풍경을 담는다. 공항 안에는 활기찬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는 수하물을 챙기고 곧바로 아비스코로 가기 위한 열차를 타러 간다. 열차의 탑승구는 사람들로 붐빈다. 대부분이 가족과 함께인 듯하다. 나는 먼지 하나 없는 듯한 맑은 느낌의 스웨덴 겨울 공기를 마음껏 마신다. 우리는 가는 길에 맥도널드에 들려 기차에서 먹을 햄버거를 산다. 맥도널드는 역시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듯하다. 아비스코까지는 약 1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장기간의 비행으로 지쳤다. 비행기에서 아무리 잠을 자더라도, 피곤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차가 도착한다. 우리는 캐리어를 힘겹게 들고 기차에 올라탄다. 자리표를 보고 자리를 찾고는 선반 위 짐칸에 각자의 캐리어를 올려놓는다. 빠르게 좌석에 앉는다. 좌석이 꽤 넓다. 의자에 엉덩이와 등을 붙인 채로, 앞 좌석에 발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아마 스웨덴 사람들이 키가 커서겠지. 아비스코까지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바퀴가 철도에 계속 부딪치면서 생기는 기차 특유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왠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만 같다.
우리는 앉자마자 바로 햄버거를 먹는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0분이다. 지금부터 14시간 뒤면 새벽 6시 30분이다. 나는 햄버거를 먹으며 아비스코까지 가는 것의 막연함을 생각하다가 바로 잠에 빠져든다.
다시 눈을 뜬다. 시계를 확인한다. 3시간이 흘러 있다. 나는 약간의 허기를 참지 못하고 기차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간다. 나는 샌드위치 2개와 물을 사고, 태우는 샌드위치 1개와 물을 산다. 판매대에 맥주도 있어서 한 번 마셔 볼까 고민하지만 그만둔다. 다시 좌석으로 돌아와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스웨덴의 도시를 벗어난 듯하다. 기차의 불빛에 비춰 조금씩 보이는 나무들과 어둠만이 보인다. 왠지 편안함을 느낀다.
보고 싶었던 영화 2개를 연달아 본다. 기차 안에서 보려고 아껴뒀던 영화들이다.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영화 장면과 그 소리에만 집중을 한다. 영화 2개를 다 보고 나니 12시이다. 또다시 졸음이 쏟아져 의자에 기대 잠에 든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있다. 한 나라임에도 이렇게 풍경이 다를 수 있음에 놀란다. 수많은 나무들과 그 나무들을 덮은 하얀 눈, 눈으로 덮인 갈색빛의 흙들, 간간이 보이는 눈이 쌓인 붉은색 벽돌 집들이 기차의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간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순록이 썰매를 끌고 여기저기 뛰어다닐 것 같은 풍경이다. 창 밖을 계속 보고 있다가 진짜 순록을 보고 놀란다. 생각보다 크기가 크다. 멍해 보이는 눈빛이 귀엽다. 실제로 순록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태우도 순록이 두리번대는 모습을 계속해서 카메라로 찍고 있다. 우리 둘 모두 처음 보는 풍경에 신이 난다. 학원, 자습실, 교실에만 박혀 있었던 과거의 내가 안쓰럽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10분이다. 흰색 구름들로 가득한 하늘은 바닥에 쌓여 있는 눈들과 이어져서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 마치 흰 도화지 속에 집과 산을 그려 넣은 것만 같다. 우리는 기차 앞에 있는 전광판을 보고, 역을 확인한 뒤에 아비스코에서 내린다. 태우와 나는 미리 예약 한 숙소를 찾아서 걸어간다. 손에 눈꽃 하나가 떨어진다. 눈꽃의 차가움과 시림이 온몸에 전달되는 듯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태우와 나는 기쁨에 겨워 눈이 가득 쌓인 이곳저곳을 마음껏 뛰어다닌다. 풍성히 쌓인 눈밭에 눕는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옷이 젖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단지 눈의 차가움을 온몸으로, 온전히 느낄 뿐이다.
털모자와 코트에 묻은 작은 눈덩이들을 털어 낸다. 눈을 한가득 뭉쳐서 태우에게 던진다. 태우는 눈을 맞고는 당황한다. 그러고서는 질 수 없다는 듯이 엄청나게 큰 눈덩이를 나에게 던진다. 나는 그 눈덩이를 맞고 물에 빠진 생쥐 마냥 젖는다. 서로 웃음이 터진다. 눈싸움을 계속한다. 어릴 적 그 해맑던 어린애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는 눈싸움을 끝내고 다시 숙소를 향해 나아 간다. 저 멀리에 예약할 때 사진으로 봤던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전구들이 가득 달린 나무로 지어진 집이다. 전구가 켜지는 저녁에는 얼마나 더 예쁠지 상상한다. 숙소 체크인이 11시부터 가능하기에 우리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으러 간다. 시계를 확인하니 8시 20분이다. 문을 여니 식당의 벽과 바닥은 따뜻한 느낌의 흙갈색 나무로 되어 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와 어두운 조명 덕분일까, 편안하고 차분하다. 나무로 된 큰 테이블 위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운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 싱싱한 연어와, 햄 살라미, 토스트와 각종 빵들이 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나온다. 테이블에 캐리어를 놓고 온 뒤에 접시를 챙겨서 먹고 싶은 만큼 담는다. 첫 입으로 연어를 한 입 먹는다. 소스 없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맛있다. 방금 갓 잡아 올린 것처럼 싱싱하고, 부드럽고 기름지다. 기름진 풍미가 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다음으로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햄 살라미와 빵을 같이 먹는다. 역시나 소스가 없음에도 짭짤하고 맛있다. 빵의 고소한 맛과 햄의 짭짤한 맛이 잘 어울린다. 베이컨도 바싹 굽지 않고 살짝 구워서 너무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다. 스웨덴에 도착해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이 없는 우리는 음식을 계속해서 입에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그 많던 음식을 다 비워냈다. 우리는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면서 방으로 간다. 방으로 가는 길에 공용 공간 표지판을 보고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가 본다. 공용공간 안은 따뜻한 느낌의 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진 의자와 불을 피워낸 화구로부터 나오는 따뜻한 열기로 가득 차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새하얀 설원과 그와 대비되는 밝은 햇빛이 아름답다. 3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던 하늘은 맑아져 있다. 태우는 맑은 하늘을 보고 오로라 관측이 가능할 것 같다는 기대감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눈밭에서 큰 타월만을 몸에 감싼 채 걷는다. 자세히 보니 사우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인다. 놀람과 동시에 흥미를 느낀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다는 체감 한다. 우리는 잠에 들기 전에 사우나에 가기로 한다.
나와 태우는 공용 공간에서 나와 밖으로 나간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40분이다. 체크인 시간인 오전 11시까지는 아직 1시간 20분이나 남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직원 숙소에서 스키복을 입은 선한 인상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크고 파란 눈과, 약간의 회색빛이 도는 머리, 환하게 웃는 미소, 꽤 잘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자신을 숙소의 직원이라고 소개하고 우리에게 스노모빌을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나서 그를 따라간다. 스노모빌 근처에는 우리 말고도 두 일행이 더 있다. 다들 기대에 찬 표정이다. 내가 먼저 타고 태우는 내가 타고 돌아온 후에 타기로 한다. 나는 직원의 뒷자리에 탄다. 생각했던 것보다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넓다. 그는 나에게 준비가 됐냐는 말을 하고는 스노모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으로 파고든다. 고개를 들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본다. 동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풍경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역동적인 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담고 얼어붙은 폭포, 눈 밭을 뛰어다니는 순록들, 흰색의 물감처럼, 때 묻지 않고 새하얀 설산. 온 세상이 하얗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스노모빌의 엔진 소리를 따라서 심장도 뛰어 댄다. 먼지 하나 없는 듯한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신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잠시 동안 새장 속에서 벗어난 새가 된 기분을 느낀다.
스노모빌이 방향을 돌린다. 나는 아쉬움을 입에 머금은 채로 내가 눈으로 담아뒀던 풍경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직원이 나의 표정을 보고 아쉬움을 알아챈 듯이 말한다.
“다음에 또 태워줄게요.”
“감사합니다.”
스노모빌은 빠르게 이동하여 숙소 앞으로 도착한다. 직원은 나를 내려준 뒤에 태우를 뒤에 태우고선 유유히 사라진다. 나는 눈 덮인 온 세상을 바라본다. 한 시도 낭비하지 않고 지금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앞으로는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는 풍경이라는 불안감과 아쉬움이 밀려온다. 나무 사이로 사라졌던 스노모빌들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 스노모빌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다들 만족한 표정이다. 태우도 내리자마자 나에게 생생한 느낌을 열렬하게 설명한다. 즐겁다. 우리는 옆에서 같이 스노모빌을 탄 미국에서 온 가족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 준다. 인종과 상관없이 세계가 모두 어우러지는 기분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40분이다. 우리는 숙소 체크인을 하기 위해서 로비로 간다. 체크인을 하고서는 바로 방으로 향한다. 우리는 낑낑대면서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른다. 힘들게 3층까지 끌고 와서는 303호를 찾는다. 철컥. 방문을 연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밝은 색의 벽지로 인테리어 된 내부가 훤히 보인다. 어디선가 가벼우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풍겨 온다. 밝은 회색빛의 벽지와 커튼, 흰색 시트를 덮은 침대로 인해서 화사한 느낌이 든다. 캐리어를 꺼내서 짐을 풀고 바로 침대에 가서 눕는다. 푹신하다. 침대가 내 몸의 모양대로 움푹 파진다. 침대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 같다. 나는 그 편안함에 잠에 빠진다.
눈이 쉽게 떠진다. 눈을 계속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눈꺼풀이 한없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시계를 보니 12시이다. 태우는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태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창밖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설원이다. 태우는 내가 일어난 것을 보고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자고 한다.
우리는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라면에 넣고 흰 눈을 배경으로 라면을 먹는다. 한식을 먹으면 현재 있는 곳이 한국인 것처럼 느껴진다. 음식이 우리나라의 온기를 가져다주는 것 같다.
우리는 라면을 남김없이 비운다. 배가 완전히 차지 않아서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에 라면에 말아먹는다. 차갑던 몸의 핏줄 하나하나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다 먹은 라면을 치운 뒤에 침대에 눕는다. 잠시 누웠다가 창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끌리듯 테이블에 앉는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튼다. 그냥 하염없이, 하얀 설원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동안 해왔던 많은 고민과 걱정, 불안을 한 번에 떨쳐내려는 처절한 시도라도 되는 양,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풍경을 보고, 노래를 듣는다.
그렇다 문득 정신 차려 보니, 어느덧 바다를 닮아 있던 하늘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도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나는 지금에서야 진정으로 자유롭다.
우리는 일몰을 보러 밖에 나간다. 흰 눈과 붉은 하늘의 대비가 신비로워 보이면서도 아름답다. 태양은 어째서 처음 하늘로 뜰 때와, 하늘을 지나서 수평선 너머로 질 때 가장 예쁜 것일까.
수평선과 점점 가까워지던 태양은 긴 혈투를 하다 결국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제는 갖가지 색이 섞인 하늘만이 남았다. 우리는 모든 지나가는 것의 아쉬움에 대해서 얘기하며 숙소로 되돌아간다. 숙소에 돌아와서 시계를 보니 3시 10분이다. 어느덧 하늘은 밝은 색을 거의 잃고 검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저녁이 되기까지는 아직 꽤 남았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아침에 봤던 사우나가 떠오른다. 나는 태우에게 사우나를 하러 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수영복 바지를 챙기고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사우나로 간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덜덜 떤다. 발을 동동대면서 사우나를 향해 뛰어간다. 숙소의 다른 건물에서 가운을 입고 나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그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먼저 사우나로 들어간다. 원형으로 둘러 쌓인 좌석 중앙에 뜨거운 돌과 그 돌을 데우는 기구가 있다. 그 옆에는 돌에 물을 뿌릴 수 있도록 물을 담은 나무판과, 스푼처럼 생긴 물뜨개가 있다. 차가웠던 몸이 따뜻하게 녹는다. 몸이 곧 흘러내릴 것만 같다. 정신이 몽롱하다. 우리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운을 입은 외국인 3명이 들어온다. 한 동안 어색한 침묵이 계속된다. 용기 내어서 영어로 먼저 말을 걸어 본다. 그들은 우리보다 1살 많은 21살 대학생이며 이탈리아에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은 놀란다. 그중 한 명이 KPOP의 광팬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그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말문이 트인 우리는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한국 음식,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묻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한국에서의 다양한 생활에 대해서 묻는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하며 대화를 이어 나간다. 1시간쯤 뒤에 태우가 덥다면서 밖으로 나간다. 나는 이탈리아의 대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태우를 따라서 사우나를 나선다. 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완전한 어둠이다. 가까이에 있는 나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무서우면서도 편안하다. 이탈리아의 대학생들도 따라 나온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흘렀던 땀이 단숨에 마르는 느낌이다. 시원하다.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강한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온다.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태우와 나는 이탈리아 대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숙소로 향한다. 다시 포근한 침대에 몸을 맡긴다. 여유로운 지금이 행복할 뿐이다. 5시쯤 누군가가 우리 방문을 두드린다. 숙소의 직원이다. 순록고기 수프를 만들었다고 한다. 순록고기 수프라니.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다. 우리는 외투를 걸치고 식당으로 간다. 식당에는 15명 정도의 투숙객이 모여 있다. 두 개의 테이블 만한 냄비에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연기를 뿜어대고 있다. 둥그런 식탁에 둘러앉아서 각자 받은 접시에 수프를 덜어 먹는다. 맛을 보니 어디선가 먹어본 맛이다. 조금 더 구수하고 담백한 소고기 스튜 맛이다. 간이 딱 잘 맞아서 밥을 말아먹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추워서 언 몸이 따뜻해진다. 접시에 담아준 빵을 스튜에 찍어 먹는다. 가족끼리 도란도란 얘기하며 밥을 먹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를 부러움을 느낀다.
보기 좋지만 일부로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가 식당 안으로 들어온다. 아까 스노모빌을 태워줬던 숙소 직원이다. 밥을 먹고 오로라를 보러 갈 예정이라고 한다. 또다시 설레기 시작한다. 꿈에서만 봤던 오로라를 실제로 본다니.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렇게 빨리 이뤄도 되나 싶다. 7시까지 로비에서 모이기로 한다. 태우와 나는 숙소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충전시키고 옷을 껴입기 시작한다. 니트에 조끼 패딩을 입고 또 그 위에 스키복을 입는다. 목에는 털 목도리를 감는다. 나와 태우는 서로의 뚱뚱해진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호텔 로비로 내려간다. 다들 추위를 대비해서 단단히 챙겨 입었다.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우리의 숙소는 빛난다. 벽에 걸린 꼬마전구들, 빨간색 장신구와 노란색 별로 꾸며진 초록색 트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뿜어대고 있다.
우리는 숙소 직원을 따라서 나간다. 칠흑 같던 좀 전까지의 밤하늘과는 다르게,
지금의 밤하늘은 꽤 밝다. 하늘에는 초록빛이 살짝 어려있다. 직원은 오늘 구름도 많이 없고 날씨가 좋아서 선명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다 같이 붙어서 간다. 그 모습이 마치 펭귄들이 붙어서 걸어가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점차 초록빛 하늘에 가까워진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꽁꽁 언 호수에 도착한다. 호수의 얼음 위로 눈이 쌓인 것이 아름답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숨이 막힌다. 아비스코의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차 있다. 그 별들을 피하려는 듯이 오로라는 별들 사이사이로 자신의 초록빛을 마음껏 뽐낸다. 아름답고 황홀하다. 오직 그 생각뿐이다. 오로라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자신의 모양과 선을 바꾼다. 마치 바이올린의 촘촘한 줄이 활의 의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 같다. 빛의 선이 마구 얽혔다가 풀어졌다가를 반복한다. 초록빛이 거의 온 하늘을 뒤덮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신비롭다. 눈을 한시도 떼지 못한다. 문득 물에 비친 오로라의 모습이 궁금해져서 호수 근처에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간다. 물에 비친 오로라의 모습이 더욱 황홀하다. 물은 하나의 거울이 되어 오로라가 비친 하늘을 선명하게 비춘다. 발을 차마 떼지 못한다. 직원은 오로라가 평소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며 운이 좋다고 말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간이 지났다. 몇몇은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춥고, 콧물이 폭포처럼 쏟아지지만,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태우는 먼저 숙소에 가 있겠다고 한다. 나는 태우를 보내고 혼자 눈밭에 누워서 하늘의 오로라를 바라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단지 오로라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광경이 평생 기억 속에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밤하늘을 덮은 초록빛의 오로라, 그 사이에 빛나는 반짝이는 별들, 차가운 눈, 시원한 바람,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상쾌한 바람 냄새와 정겨운 흙 향. 모든 것이 아름답다. 오로라는 초록빛을 점차 잃어 간다. 아쉬움이 밀려온다. 이제는 오로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던 별들이 보인다.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40분이다. 짐을 챙겨서 숙소로 돌아간다. 로비는 난방기구를 세게 틀었는지 무척이나 따뜻하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듯이 밀려온다. 방에 들어가서 바로 샤워를 한다. 씻자마자 눕고 이불을 덮는다. 잠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