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새로운 시작.

by 이태헌

12월 31일 저녁, 태우와 같은 반 친구 2명과 만나기로 했다. 성인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함께 술집에 같이 가기로 했다. 저녁 10시에 나와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술집을 검색한다. 거리에는 반짝이는 조명들,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남녀들, 각종 이벤트들이 넘쳐 난다. 이제 갓 성인이 된 20살들을 설레게 할 만한 것들이 거리에 가득 차 있다. 찬란한 젊음의 시작을 기념하는 청춘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언젠가는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오겠지.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태우와 친구들이 보인다. 다들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똑같은 교복만 입던 친구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라이더 재킷, 무스탕, 코트를 입고서는 저마다 머리도 스타일링했다. 나는 태우의 무스에 떡진 머리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한다. 우리는 술집 앞에서 입장 줄을 기다린다. 한껏 꾸민 여자들이 지나 가자 우리 4명 모두 동시에 쳐다본다. 우리는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터진다. 오늘따라 웃음이 헤프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젊음의 중심에 있는 듯하다. 드디어 우리 차례이다. 술집에 들어간다. 들어갈 때 약속한 것처럼 다 같이 주민등록증을 이마에 붙이고서 들어간다. 그걸 본 가게 직원이 귀엽다는 듯이 웃는다. 자리에 앉고 먼저 다른 테이블부터 쳐다본다. 오른쪽 대각선 테이블에 눈에 띄는 사람이 보인다. 연한 화장에 크고 맑은 눈, 선한 눈매, 귀여움을 가득 담은 얼굴과 밝은 목소리. 눈이 간다. 친구가 계속해서 나에게 메뉴에 대해 묻지만 그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니 그녀도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해맑게 웃는다.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린다. 심장이 떨린다.

“야 이도훈 뭐 먹을 거냐고 얘 뭐 해.”

“국물 요리 아무거나 시켜줘”

“너 누구 맘에 드는 애 있지. 딱 말해봐 누구야. 같이 합석하자고 해”

“아냐 무슨 합석이야 우리끼리 조용히 먹자.”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달려가서 같이 놀자고 말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곧 술과 안주들이 나온다. 김치찌개와 돈카츠, 꼬치구이, 소주를 시켰다. 술병을 깐다. 태우는 어디서 본 게 있는 듯이 술병을 돌려서 회오리를 만든다. 우리는 별것도 아닌 것에 웃는다. 첫 잔은 원샷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우리는 모두 첫 잔을 원샷한다. 얼굴이 확 뜨거워진다. 무슨 맛이지. 마치 손 소독제를 물, 설탕과 잘 섞은 듯한 맛이다. 이게 뭐가 맛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힘들 때마다 찾고, 알코올 중독에까지 걸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마신다. 김치찌개 5숟가락을 먹고 술 한잔, 꼬치 하나 먹고 술 한잔. 먹다 보니까 술이 계속 들어간다. 여전히 쓰기 만한 술이지만 우리는 마치 진짜 어른이 된 것처럼 마셔댄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2시이다. 술을 마셔서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이 시간까지 논 적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 떠올려 보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희미하다. 술이 들어가니까 평소에는 안 하던 얘기까지 서슴없이 한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 주제는 여느 20살 청년들처럼, 연애와 사랑으로 넘어간다. 자신들이 했던 지난 연애 이야기부터 이상형들, 스킨십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또다시 대각선 테이블에 눈이 간다. 그녀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본다. 몇 초간 눈을 마주친다. 갑자기 그녀가 다가온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피한다. 웃으면서 다가오는 그녀는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이끈다. 귀엽고 선한 느낌의 얼굴과는 대비되는 탄력 있는 다리가 눈을 이끈다. 그녀는 뜻밖에도 우리 테이블에 와서는 나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자꾸 쳐다보시던데 저 맘에 들죠?”

당황한다. 어떻게 이런 말을 여러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거지.

“아.. 네 사실 너무 예쁘셔서.”

그녀는 만족한 듯이 웃고서는 나에게 인스타 아이디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나는 순순히 가르쳐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담에 또 봐요.”

그녀는 이 말을 하고서는 친구들과 함께 웃으면서 나간다.

“얘 완전 상여자네. 사람들 다 있는데서 인스타를 따.”

“쟤가 먼저 나 쳐다봤어.”

친구들을 돌아보니 입이 떡 벌어져 있다.

“아니 저렇게 예쁘고 귀여우신 분이 왜 너를...”

“그니까. 아 얘 입꼬리 올라간 거 얄밉네. 사실 부럽다, 부러워. 잘생긴 게 최고네.”

우리는 1시간 동안 이 일로 떠든다.

“나도 다음에 예쁜 사람 있으면 계속 쳐다봐야겠어.”

갓 성인이 된 우리는 사랑, 낭만,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우리는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간다. 술기운 때문인지 차갑던 겨울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텅 빈 차도를 맘껏 뛰어다니며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무거운 먼지들이 바람에 모두 날아간다.

그러다 문득 아까 예쁘게 웃던 여자애가 생각난다. 인스타를 들어가 보니 한 명이 나를 팔로우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프로필을 들어간다. 확실히 그 여자애다. 이제 막 활짝 핀 꽃같이, 생기 있게 웃던 그 여자애. 인스타 프로필에는 ‘최유진’이라는 이름이 나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예쁘다.”

“뭐? 이도훈 너 뭐라 했냐. 누구야. 아까 술집에서 걔지?”

친구들이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내 핸드폰을 보기 위해서 달려온다. 나는 핸드폰을 꼭 잡고 필사적으로 달린다. 뛰는데 절로 웃음이 난다. 벌써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공원에 앉아 있는다. 새벽 공기는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시리고, 또 희망을 준다. 새벽 공기만의 기분 좋은 차가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진다. 첫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 집 앞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집으로 뛰어간다. 커다란 눈꺼풀이 눈을 점점 감싸온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치고 집에 들어간다.

나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서 잠에 빠져든다.

최근 들어서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꿈과 다른 점은, 한 사람이 나오는 꿈만을 반복해서 꾼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유진’이다. 최유진. 얼마 전에 술집에서 만나서 나에게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본 그 여자애. 그날부터 나는 계속해서 그 여자애의 꿈을 꾼다. 꿈에서의 유진은 여전히 적극적이었고 예뻤다.

그 여자애를 딱 한 번 봤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른다. 먼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하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을뿐더러,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본 것도 ‘유진’이라는 여자다. 내가 먼저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올리는 인스타 스토리를 빠짐없이 보기만 했다.

나는 졸업식 때까지 계속 술을 마시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재밌는 영화를 봤다. 자유로운 삶이었다.

오늘은 드디어 졸업식 날이다. 그렇게 싫어했고, 매일을 도망치듯이 하교하던 학교임에도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벌써 아쉬움이 밀려온다. 옷장 구석에 걸려 있는 교복을 입는다. 불편해서 2학년 때부터는 벌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거의 입지 않던 교복이다. 그랬던 교복이지만 이제는 못 입는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온다. 정말로 미운 정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차에서 내려서 교문을 쳐다본다. 교문에 걸린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이 왠지 나의 마음을 울린다. 평소에 사복을 잡던 선도부 교사가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학교의 정문으로 가면서 축구 골대, 철봉, 벤치 옆 나무, 모래에 시선을 둔다. 문득 학교가 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창문으로 학교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돌아본다. 소나무들이 버티고 있는 학교의 뒷산과 겨울에도 활짝 핀 꽃들을 그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 등교할 때는 선도부 교사를 피하느라, 하교할 때는 너무 지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오랜만에 천천히 학교 곳곳을 눈으로 담는다. 3-2반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3년 동안 죽도록 공부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학교 곳곳을 보니 떠오르는 추억이 있는 것이 놀랍다.

학교가 끝나면 태우와 함께 짜장면을 먹던 것도, 시험 기간에 자습실에서 본 붉은 노을도, 책을 보고 있을 때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과, 시원한 가을바람도. 모두 추억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친구들과 얘기한다. 곧 졸업식 방송이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티브이 속에서는 형식적인 졸업식 절차가 진행된다. 마지막에는 언제나처럼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시작된다. 중간에 들리는 ‘주체적인 삶’이라는 단어가 내 관심을 이끈다.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라는 말이 나의 가슴 가까이에 다가온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곧 졸업식이 끝난다. 머릿속에 생각들이 가득 하지만 그 생각의 실체를 알지는 못한다. 졸업식이 끝나고 친구들끼리, 혹은 선생님과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이 계속된다. 나는 태우와 친구들 2명, 그리고 담임교사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 3년 동안 함께 옆에 있어준 태우와, 1년 동안 함께 있어준 친구 2명과 3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교실에 비추는 햇살. 각자만의 개성 넘치는 책상들, 분필이 가득 칠해진 칠판 냄새,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 반에서 천천히 나선다. 항상 견디고 버티고 경쟁한 기억밖에 없던 교실이기에 매일을 도망가다시피 뛰쳐나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천천히 교실을 나간다.

지금까지는 남들이 정해 놓은, 사회가 정해 놓은 ‘훌륭함’이라는 기준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행복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 공부하다가 보는 아름다운 일몰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 맞는 시원한 바람도, 매 식사 때마다 먹는 맛있는 음식도 전부 소중한 것이었다. 반에서 나가서 운동장으로 나간다. 시원한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천천히 걷는다. 목에 맨 목도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학교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으로 담는다. 운동장에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교문을 빠져나오면서 너무나도 큰 해방감을 느낀다. 이제는 매일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부모와 교사로부터 받은 부담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내 노력의 결과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들과 내 성적을 비교하며 나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바다를 뒤집어 놓은 듯이 푸른 하늘을 쳐다본다. 힘찬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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