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정신이 또렷하다. 마치 잠을 푹 자고 알람 없이 일어난 어느 날의 아침 같다. 시원한 봄 공기가 나의 솜털을 훑고 가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가 어디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햇빛을 잘 받은 듯한 청록색 잔디가 나의 발을 감싸고 있다. 내가 아끼는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바지는 카키색 카고 바지를 입고 있다. 평소에 거슬려하던 큰 주머니가 신경 쓰인다. 그 주머니를 완전히 도려내고 싶은 충동이 차오르지만 그만둔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
“아 장관이다”
내가 처음 고개를 들자마자 한 말이다. 말 그대로였다. 장관이다. 산의 위쪽은 눈이 쌓여서 파우더를 잔뜩 바른 듯이 하얗다. 그 산의 아래쪽은 위쪽과는 대비되게 신기할 만큼 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다. 서로의 가지들을 맞대고 있는 나무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하는 것 같이 보인다.
나는 광활한 푸른 초원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번에는 그 충동을 거스르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단지 시원한 봄바람만이 느껴질 뿐이다.
양팔을 벌리고 그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 힘이 빠져서 잔디밭에 눕는다. 흰색 구름들이 천천히 지나가면서 나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없애곤 한다. 새소리와,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평화로움을 더 해준다. 배에서 신기할 만큼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보려 핸드폰 지도 앱을 킨다. 별점 4.2점짜리 가성비 식당과 별점 4.9점 고급 식당 중에 고민한다. 평소와는 달리 고급 식당을 가기로 결정하고 지도를 보고 따라간다. 식당 문을 열자 깔끔한 우드 톤의 나무 벽이 눈에 들어온다.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식당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이국적으로 생긴 종업원이 웃으며 나에게 메뉴판을 건네준다. 메뉴판을 보던 나는 메뉴를 고르고 종업원을 부르려 고개를 든다. 밝은 빛의 조명이 내 눈을 비춘다.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진다.
5초간 어둠을 마주 보던 나는 방금까지 보던 풍경이 꿈이었고, 지금 내가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의식이 든 지 꽤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고 누워만 있는다. 눈을 뜨자 보인 익숙한 풍경에 다시 잠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분명히 지겹도록 많이 보던 내 방이다. 부모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침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란다.
“네가 웬일로 깨우기 전에 일어났대 얼른 학교 갈 준비 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또다시 나의 일상이 시작됐다. 고개와 어깨를 떨군 채로 속옷을 챙기고 식탁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김치찌개와 김, 계란말이로 이루어진 식탁에 털썩 앉는다. 깨작깨작 밥을 먹으면서 유튜브를 본다. 언제나와 같이 두 숟가락 정도의 밥을 남기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서 눈을 감고 씻는다. 수건으로 빠르게 몸을 닦고 머리를 턴다. 거울 속에 있는 남자는 지쳐 보인다. 입술은 갈라져 피가 나기 시작했고, 크게 부은 눈꺼풀은 큰 눈을 다 가릴 정도이다. 볼살이 없어서 도드라져 보이는 광대뼈와, 빼빼 말라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갈비뼈는 오랫동안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터덜터덜 화장실에서 나와서 학교 체육복을 입는다. 스킨과 로션, 선크림을 바른다. 옳은 화장품을 손가락에 찍었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바른다. 겉옷을 입고 부모를 먼저 주차장으로 보낸다. 지하 주차장은 고급세단으로 가득 차 있다. 보통의 사람이 본다면, 여기가 한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인지, 아니면 모터쇼인지 헷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맡던 지하 주차장 특유의 숨이 턱 막히고, 꿉꿉한 냄새는 오늘따라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코를 강렬하게 자극하는 비릿한 기름 냄새는 답답한 머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나는 부모의 차를 타고 눈을 감은 채로 학교까지 간다.
“도훈아 안 될 거라는 생각은 일절 하지 말아. 무조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해. 넌 꼭 의대에 합격할 거야.”
부모는 학교를 가는 와중에도 나에게 동기부여라는 명목의 족쇄를 하나하나씩 채운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부모 모르게 이어폰을 낀다. 잠깐 동안의 자유를 누린다. 차에서 내려서 교문을 보니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가득 찬 현수막이 보인다.
현수막에는 작년에 보냈던 자랑스러운 의대생들의 대학과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큼지막하게 걸어놓은 현수막을 보며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친구들이 경쟁자가 되는 그런 시기를 잘 버텨내고, 남들이 말하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그들이, 부러우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횡단보도에 초록 불이 켜지고 나는 언제나와 같이 교문으로 향한다. 교문 앞에는 학교에서 깐깐하기로 유명한 선도부 담당 교사가 서 있다. 그는 작은 눈으로 여기저기 노려 보더니, 내 체육복을 보고는 손짓한다. 나는 익숙하게 터덜터덜 걸어간다. 어차피 담임교사에게 부탁해서 상점으로 벌점을 상쇄하면 된다는 생각에 별말 없이 내 이름과 학번을 말한다.
반에 도착하자 책을 읽고 있는 태수를 본다. 태수는 항상 학교에 일찍 와서 책을 읽고 있었다. 태수와 나는 항상 그랬던 대로 함께 자습실에 간다. 자습실은 언제나 꽉 차 있었다.
자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 간다. 나무 문 특유의 삐그덕 대는 소리가 난다.
한 공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느껴지는 특유의 답답한 공기가 느껴진다. 나는 자습실에 오자마자 내 자리 근처의 창문을 연다. 정겨운 냄새가 난다. 나무 원목으로 만든 책상의 쿰쿰한 나무 냄새.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의 깨끗하고 따듯한 냄새. 나무 바닥의 삐걱 대는 소리. 의자의 끼익 대는 소리. 자습실에 비치되어 있는 담요의 폭닥폭닥한 냄새.
나중에는 이것들 때문에 자습실이 그리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삐걱 대는 나무 바닥을 천천히,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간다. 그러고서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1교시 시작 시간인 8시 20분까지는 국어 필기를 되돌아본다. 교사가 했던 말을 모두 적은 교과서 위의 빽빽한 필기를 바라본다. 교사가 뱉어냈던 말을 곱씹어 보면서 서술형으로 나올 만한 문제를 생각하고는 메모장에 끄적인다. 시작종이 울리자 나는 1교시를 듣기 위해서 교실로 간다. 반에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새우처럼 등을 굽힌 채로 자고 있거나 혹은 그 작은 스마트폰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운동을 좋아하고, 남을 웃기는재주가 있는 활발한 남자애들은 큰 소리로 떠들면서 지들끼리 웃거나 공을 차고 논다. 나는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쉬는 시간마다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공부한다.
그들은 내가 들으라는 듯이 공부만 하면서 청춘을 낭비하는 것이 아깝고 한심하기도 하다며 내 근처에 모여서 떠들기도 했다. 그들은 항상 추억과 경험의 가치를 열띠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기적으로 내 몸을 축구공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 특유의 내려간 입꼬리와 미간에 생기는 주름은 나의 기분을상하게 했다.
1교시가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 친다. 교사가 하는 말들을 볼펜으로 빠짐없이 전부 필기한다. 교사가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해댄다. 나는 알고 있는 내용을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대충 대답한다. 1교시 마침종이 친다. 나는 교사가 서둘러 나가려는 것을 붙잡고 질문을 해댄다. 대개는 시험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한 질문들이다.
“ㅣ모음 뒤에 형식 형태소가 와서 구개음화가 안 일어나는 예시가 또 있나요? 이거 말고 다른 예시가 무엇이 있나요? 이 정도까지는 안 나오겠죠?“
“그래. 열심히 하네 도훈이.”
쉬는 시간에는 그전 시간에 배웠던 것을 복습한다. 2교시 시작종이 친다. 교사가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엎드려서 퍼질러 자고 있는 애들을 깨운다.
“자 일어나자. 공부해야지.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뭐 먹고살래.”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가 보라는 듯이 더 크게 코를 고는 학생도 있다.
“학원에서 다 배워서 오늘은 잘게요. 어제 밤샜어요.”
“어휴 그래 자랑이다. 학원에서 시험 문제라도 가르쳐 주냐?”
학기 초에는 학원 얘기만 들어도 화부터 내던 수학 교사는, 이제는 포기한 듯이 보인다.
최근에는 학원 선생이, 학교의 교사보다 더 좋은 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학 교사는 잠을 자는 학생들을 무시한 채로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수업을 듣는 척하면서 학원에서 준 교재를 푼다. 가끔씩 시험에 대한 힌트를 줄 때만 귀를 기울이고, 시선은 문제집에 고정한다.
“자 삼각함수는 삼각비와 관련이 있어”
수학 교사의 수업 내용과 문제집 속의 수열의 내용이 충돌한다. 나는 교사에게 정중히 수업을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것을 깨우치고는 그만둔다.
수학 교사는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삼각비가 무엇이지? 정의를 말해봐”
삼각비의 정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닌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교과서에 나온 삼각비의 정의를 성의 있게 말하고서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린다.
수업 마침 종이 친다.
나는 일부로 수학 교사가 같은 층에 있는 교무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고서는 질문을 하러 문제집을 들고 찾아간다.
내가 문제집을 들고 찾아가자 수학 교사는
“아까 수업 끝나고 오지”라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나는 수학 교사가 문제를 보는 중에 책상 위에 꽂힌 문제집들을 훑는다. 그리고 머릿속에 다 집어넣는다.
교사가 문제를 다 풀고서는 설명을 한다. 설명을 끝낸 뒤에 좋은 문제라는 칭찬을 한다. 이 문제와 유사한 문제가 시험에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교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수학 교사의 책상에서 봤던 문제집들을 검색한다. 그리고 곧바로 집으로 배송을 시킨다.
3교시는 영어 수업이다. 나는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교사의 수업을 듣는다.
4교시는 이동 수업이다. 생명과학 수업. 수능 기출문제집을 챙겨서 5층의 생명과학실로 향한다. 기출문제집의 풀이가 수업 시간 동안 이뤄진다. 선생님의 어조나 말투, 설명의 길이를 고려하여서 시험에 낼 만한 문제에 빨간펜으로 체크 표시를 한다.
4교시 마침 종이 친다. 점심을 먹으러 달려가는 생기 넘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을 느낀다. 그저 뒤처지지 않게 빠르게 친구들을 따라갈 뿐이다. 태우를 비롯한 친구들이 밥을 다 먹었다. 그들이 핸드폰을 하며 내가 밥을 먹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불현듯 한다.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의 표정을 신경 쓰면서 서둘러 밥과 반찬을 입에 욱여넣은다. 오늘도 점점 볼이 늘어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배식판에 남은 음식을 버리고 휴지로 입을 닦는다. 매점에 가는 친구들에게 힘 없이 인사하고 교무실로 간다.
“봉사하러 왔구나? 여기 출석부에 이름 적고 청소 도구 가져가.”
둥글게 튀어나온 배만큼 여유가 느껴지는 선생님이 말했다.
“네”
태우와 나는 청소 도구를 챙겨서 학교 뒷산으로 간다. 운동장에서는 한창 축구 경기가 펼쳐져 있다. 친구들끼리 하는 축구 시합임에도 모두가 죽을 기세로 뛴다. 쓸데없는 것에 과한 열정을 쏟는 그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것에 열정을 쏟을 여유가 있다는 것이 부럽게만 느껴진다.
뒷산에 올라가면서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는다.
“근데 태우야 너는 왜 교내 봉사를 신청한 거야?”
“봉사 활동을 하면서 선하게 사는 것이 가치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게 좋아.”
봉사 활동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입시에 들어갈 점수를 채우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는 나와 태우는 달랐다. 항상 태우는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해 줬다. 나는 늘 태우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했다.
담배꽁초를 주으러 올라오다가 뒷산의 정상에 올라온다. 동네에 있는 학원 건물들이 훤히 보인다.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허공에 초록빛을 흩뿌린다. 천천히 지나가는 구름은 마음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모래시계를 잠시 멈추어 준다. 크게 심호흡한다.
청소 도구를 들고 태우와 함께 뒷산을 내려온다.
교무실에 들러서 청소 도구를 제자리에 놓는다. 교사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반으로 돌아간다.
반에는 나와 태우밖에 없다. 나는 오늘 공부할 것을 챙겨 자습실로 간다. 태우는 언제나와 같이 소설책을 챙긴다. 자습실로 올라가 보니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수학 문제를 푼다. 지수와 로그를 전환하고, 삼각함수의 주기를 찾고, 등비수열의 등비를 찾아나가며 문제를 푼다. 머리가 아파 잠깐 눈을 감고 스트레칭을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같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똑같이 학원에서 받은 수학 문제집, 똑같은 학원 교재들. 똑같은 수업 정리본. 마치 일련의 잘 훈련받은 군인들의 모습 같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지난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한 박보경이 그의 친구인 엄태구와 큰 소리로 얘기해 댄다. 이번 학기에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시험을 망할 것 같다는 걱정부터 선생님의 출제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자신이 없다는 등 사실인지 기만인지 모를 말들을 자습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해댄다.
그들의 대화가 신경 쓰인다. 자습실에서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들의 눈은 문제집 혹은 시험 대비 교재에 가 있지만 각자가 쥐고 있는 펜들이 멈춰 있다. 자습실 안에 있는 모두가 저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하다.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10분을 날렸다. 시간 낭비를 한 사람들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그 자습실에 있던 친구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의 눈에서 독기가 보인다. 그들을 계속 보고 있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린다.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눈빛들 중 유일하게 평온하고 반짝이는 눈빛이 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태우’이다.
태우는 내가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친구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1학년 중간고사를 망쳐서 계단에서 몰래 울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휴지를 건넸다. 그날 난 자퇴를 하고 수능을 볼 것을 결심했던 상황이었고, 노력한 만큼 안 나온다는 크나큰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던 날이었다. 태우는 내 고민을 조용히 들어주더니 나에게 어떠한 해결책도 건네주지 않고 옆에 있었다. 그때부터 태우는 무언가 달랐다. 열에 아홉은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조언이나 해결책을 내세웠다.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태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의 고민을 천천히 들어주기만 했다. 내 말을 중간에 끊거나 내 말에 대한 반응 없이 그저 조용히 끄덕였다.
왠지 그에게는 내 비밀과 속마음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우는 공부를 잘하지는 않는다. 사실 잘할 수 있는데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태우는 공부보다는 세상 자체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나는 항상 태우와 같이 자습실에 간다. 태우는 그때마다 다양한 나라의 소설부터 에세이, 경제와 경영 관련 전문 서적 등 수많은 책을 읽어 갔다. 나는 태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항상 호기심을 느꼈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또 오늘은 무엇을 할까. 어느 날은 책을 읽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알바를 하러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영어로 적힌 주식창을 보고 있었다. 매일 뉴스를 보고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에 대해 글을 끄적였다. 태우는 다른 학생들과 다른 느낌이었다. 당연하게도 나의 부모는 내가 태우와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공부에만 집중해서 의대에 가야 할 시기에 입시와 관련되지 않은 알바, 책, 주식, 뉴스 등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부모는 책이나 뉴스도 입시와 관련된 것들만 추려서 시험이 끝난 후 몰아서 읽게 했다.
부모는 내가 태우에게 물들까 봐 걱정을 했고 그에게 혹은 그가 하는 행동에 호기심을 갖는 것도 경계했다. 그럼에도 태우에게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닮고 싶은 점이 있었다.
그런 태우가 묵묵히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줬기 때문에 자퇴를 하지 않고, 망친 중간고사 성적을 기말고사에서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태우에 대해 생각하던 중 5교시 수업 예비종이 친다. 반으로 내려간다.
5교시 일본어 시간에는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면서 선생님께서 시험에 대한 힌트를 줄 때만 간간히 듣는다.
6교시 지구과학 시간에는 교재로 쓰는 수능 특강의 풀이가 진행된다. 선생님의 풀이와 내 풀이를 비교해 가면서 수업을 듣는다. 실제 지각의 모습이나 지각 작용이 일어나는 영상을 보여준다거나 무언가를 실제로 실험해 보는 활동 같은 건 사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는 단지 문제를 풀 뿐이다. 우리는 입시를 위해서 공부할 뿐이다.
7교시 물리 시간에는 역학에 대해서 배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 배운다는 물리는 나에게는 그저 내신을 갉아먹는 어려운 과목일 뿐이다. 각종 물리 법칙들은 나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단지 외워야 할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7교시가 끝나자마자 물리 교사이자 내 담임교사가 반에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학생들에게 얼른 집에 가라고 한다. 가끔은 담임교사의 귀차니즘이 너무도 고마울 뿐이다. 서둘러 뛰쳐나간다. 최대한 빨리 걷는다. 최대한 빨리 학교를 벗어난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쳐 가며 집에 갈 자신이 없다. 택시를 부른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애매하게 아는 친구들이 지나간다. 나는 피곤한 인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 핸드폰에 눈을 고정시킨다. 다행히 그 친구들도 대수롭지 않게 내 뒤로 유유히 지나간다. 택시가 도착한다. 택시 기사에게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고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문을 연다. 봄바람이 불어온다. 따뜻하고 깨끗하다. 꽃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 집중한다. 꽃이 바람을 타고 마치 연처럼 날아다닌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머리가 휘날린다. 바람을 맞는 지금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나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배달 앱으로 음식을 시킨다. 택시가 집 앞에서 멈춘다.
“학생 여기 맞죠?”
“네 맞아요.”
카드를 단말기에 찍고 내린다. 뒤를 돌아서 바람결을 느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평소 자주 보던 여행 유튜브를 본다. 엘리베이터에 탄다. 4층을 누른다. 집 문 앞에 배달 온 음식을 챙겨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음식 포장을 뜯는다.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태블릿을 방에서 챙겨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평소 가고 싶어 하던 여행지를 치고는 관련 영상들을 본다. 영상을 보다 보니 오늘 꾸었던 꿈이 생각난다. 꿈이지만 아주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지금까지 꿈의 내용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꿈속에서 스위스의 산맥처럼 아주 광활하고 압도되는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누워 있었다.
나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서 그 꿈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 가이드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간 10분이나 지났다. 밥 먹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는 것에 자책한다. 건강을 위해 홍삼음료를 먹는다는 이유로 다시 식탁에 앉는다. 보던 영상을 끝까지 마저 본다. 또다시 10분이 지났다. 몸이 무거워진다. 쓰레기를 버리고 태블릿을 틀어 놓은 채로 양치한다. 태블릿을 밖에 두고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하고 나와서 다시 태블릿을 킨다. 머리를 말리고, 화장품을 손에 찍어 바르면서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다. 금방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30분이 지났다.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손을 바닥에 짚고는 최대한 천천히 일어난다. 태블릿을 침대에 두고 책상 위에 앉는다. 답답하다. 마음속 공간이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 든다. 창문을 연다. 바람이 머리를 쓸고 지나간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바람이 어디론가로 멀리 데려가길 바라본다. 약간의 위안을 느끼며 심호흡한다. 눈을 감는다. 힘겹게 미소 짓는다. 다시 펜을 잡는다. 마음 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