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꿈, 불행한 현실

by 이태헌

조선 시대 작품의 정서에 공감하려고 한다. 역학 문제를 계속해서 푼다. 지질의 특성을 계속해서 외운다. 머리가 아파 짧은 유튜브 쇼츠를 본다. 다시 펜을 잡지만 얼마 안 되어 펜을 놓는다. 머리가 바늘로 찌르듯 짜증 나게 아프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 30분이다. 더 이상 머리에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외우는 것을 멈춘다. 수학 문제를 푼다. 단순히 외우는 것보다는 삼각함수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프를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시계를 보니 10시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냉장고 앞으로 간다.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유튜브를 본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시계를 보니 10시 40분이다. 침대에 눕는다. 대학에 합격하고 합격증을 자랑하는 상상을 한다. 과잠을 입고 예쁜 캠퍼스를 거니는 상상을 한다. 학교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상상을 하다가... 정신이 흐려진다. 상상 속 이미지가 블러 처리를 하듯이 흐려진다. 점점 의식을 잃는다.


눈을 떴다. 눈이 부시다. 눈이 부셔서 고개를 아래로 숙인다.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까끌까끌한 촉감이 손에 느껴진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서 정면을 응시한다. 바다에 비친 다홍빛의 하늘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름답다. 붉은빛을 마구 발산하는 태양이 그 주변의 하늘까지 천천히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초록빛의 야자수 나뭇잎들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이 나의 얼굴을 감싼다. 주변을 둘러본다. 매끈해 보이는 나무판자에 형형 색색으로 ‘HAWAII’라고 쓰여 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풍경만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점점 더 붉어진다. 하늘을 비추는 바다도 반짝거리며 붉어진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은빛깔의 모래 사이로 누군가가 다가온다. 구릿빛 피부의 선명한 복근, 크고 탄력 있어 보이는 가슴과 엉덩이까지, 예쁜 미국 여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미인상이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시선이 간다. 대놓고 그녀를 쳐다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녀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그녀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짐들을 선베드에 올려놓고선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지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나에게 자신을 노골적으로 쳐다본 것에 대해서 따지러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나에게 밝은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말한다. 그녀는 자신을 ‘헤일리’라고 소개한다. 그러고서는 자신과 함께 놀지 않겠냐고 나에게 묻는다. 남고에 다녀서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 오랜만인 나는 가슴이 떨린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을 들은 헤일리는 곧바로 내 팔짱을 끼고 바다로 날 끌고 간다. 감각이 둔한 팔꿈치로도 그녀의 풍만하고 몰랑몰랑한 가슴이 느껴진다. 실제로 여자의 가슴을 제대로 보거나 만져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본능 때문일까,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에 눈이 간다. 눈앞에 평생 한 번밖에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아름다운 일몰이 있지만 그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여분 옷이 없지만 그녀가 이끄는 대로 하와이의 태양이 담겨 있는 바닷속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간다. 세상을 둘로 나누는 수평선의 경계가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헤일리의 손을 잡고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헤일리는 순수한 얼굴로 웃으면서 나에게 물을 뿌려댄다. 나도 그녀에게 물을 뿌린다. 그녀를 안아 들어서 빠뜨린다. 그렇게 서로를 적시며 놀던 우리는 엉망이 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파도 속으로 함께 들어가서 물살을 느껴본다. 파도가 친 뒤에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미역 줄기를 보고는 크게 웃는다. 함께 손을 잡고 석양을 바라본다. 쨍한 붉은빛의 태양은 그 근처의 구름들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다. 그것은 수평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그 줄에서 내려온다. 나와 헤일리는 한참 동안 태양이 사라진 수평선 너머를 쳐다본다. 우리는 붉은 태양이 떠 있는 동안 물과 모래사장을 왔다 갔다 했다. 붉었던 하늘이 차츰 어두워질 즈음에 그녀는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나를 끌고 간다. 그녀는 나를 나무로 만들어진 한 건물로 데려간다. 가까이 가서 보니 ‘HAWAII KITCHEN’이라는 간판 주변으로 반짝이는 전구들이 매달려 있다. 문을 열어보니 검붉은 빛을 띤 나무 책상과 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됐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가죽 의자는 푹신하고 편해 보인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 소리는 나에게 왠지 모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헤일리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듯 종업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한다. 나는 갈색의 부드러운 종이 위에 쓰인 ‘하와이안 피자’, ‘라자냐’, ‘소등심 감자 스테이크’ 등이 적힌 메뉴판을 보며 해석해 보다가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네준다. 우리는 잠깐 동안 서로의 얼굴을 본다. 웃음이 터진다.

헤일리는 나에게 “여기에 온 이유가 뭐야? 몇 살이야?”라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직업이 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하와이에 며칠 동안 있을 건지, 여기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뭔지, 하와이에 와서 가본 곳 중에 가장 좋은 관광지는 어딘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과 취미가 뭔지에 대해서 묻는다. 나는 어떻게든 지금까지 외웠던 수능 영 단어를 이용해서 천천히 대답했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헤일리는 계속 해맑게 웃는다. 나는 대부분의 질문에는 손쉽게 대답했지만, 하와이에 관련한 질문에는 당황했다.

대충 4일 동안 머문다거나, 평소에 알고 있던 관광명소를 말하며 겨우 넘긴다. 재미없을 만한 내 대답에도 그녀는 계속 해맑게 웃으며 내 대답에 리액션을 해줬고, 나는 긴장이 풀리면서 조금 더 편하게 말하고 장난도 쳐댄다.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 시원한 바람결과 저 끝에서 들리는 시원한 파도 소리, 부드러운 그녀의 손 모두 나의 감각을 자극한다. 황홀하다. 시간이 멈추고 여기서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헤일리는 예쁘고, 밝았다. 우리는 서로를 뚫어지게 보면서 끊임없이 탐닉했다. 문득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잘 빚은 도자기처럼 빛났고, 젤리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녀의 목을 잡고 뽀뽀하고 입을 뗐다. 그러자 헤일리는 나를 귀엽다는 듯이 보고는 내 옆으로 와서 입을 맞췄다. 좋은 냄새가 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헤일리의 두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우리는 서로의 혀를 섞는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려온다. 뒤이어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갑자기 머리 위로 살얼음을 동반한 물이 한가득 쏟아진다. 너무나도 놀라 벌떡 일어난다.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진다. 내 앞에는 양동이를 들고 있는 부모가 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는 부모를 있는 힘껏 노려보면서 말한다.

“너를 위한 거야 도훈아. 학교 가야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런 의지력으로 도대체 의대는 어떻게 가겠다는 건데?”

여기에서 부모의 말에 반박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부모를 지나친 뒤에 화장실로 들어간다. 꿈속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은 얼굴에 눈매가 선한, 그런 청순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헤일리가 눈앞에 아른아른거린다.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와 가슴, 입술이 생각난다. 한숨을 내쉰다.

물을 틀고 눈을 감는다. 물을 맞았을 때의 당혹감과 부모에 대한 분노,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헤일리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내보내려고 노력한다. 머리와 몸을 물로 적신다.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세게 몸을 닦는다. 생각을 비우려 머리를 있는 힘껏 털어 낸다. 서둘러 화장실에서 나온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체육복을 입고 빠르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차에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부모가 앉아 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차에 타고는 이어폰을 낀다. 부모가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이 어렴풋이 들리지만 대꾸하지 않는다. 대신 이어폰에서 들리는 노래에 집중한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말 없이 내린다. 교문으로 서둘러 뛰어간다. 선도부 교사가 없는 것을 알고 안심한다. 계단을 뛰어올라서 교실 앞까지 온다.

허겁지겁 교실에 들어오자 반 애들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 모두들 내가 지각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이다. 몇몇 나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애들은 재밌다는 듯이 지들끼리 수군대고 있다. 역겹다. 혼자 있고 싶다. 당장이라도 이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꿈에서 봤던 하와이의 노을과 헤일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곳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벗어나지 않는다. 가득 차다 못해 넘칠 것 같다.

1교시에는 수학 교사가 들어온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습 시간을 준다. 하지만 그 자습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단 몇 명뿐이다. 쉬는 시간에는 놀다가, 자습 시간만 되면 질문을 하는 애들이 신경 쓰인다. 선생님의 꾸중에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의 표정이 무언가 꺼림칙하다.

점심 종이 울린다. 책을 책상 밑에 넣고 밥을 먹으러 간다. 점심 종이 울리자마자 서둘러 달려가는 이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낀다. 생기가 넘치는 것이 딱 그 나이대의 학생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은 내가 밥을 먹는 것을 기다렸고, 태우와 나는 교내 봉사 활동을 하러 갔다. 5, 6, 7교시도 어김없이 자습 시간이다.

선택 과목 교실로 가는 것조차 번거롭다. 힘 없이 터덜터덜 걸어간다. 시험이 5일 남은 교실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7교시를 끝내는 종이치고 나는 빠르게 반으로 간다. 어김없이 담임교사는 오자마자 별다른 안내 사항 없이 집으로 가라고 한다. 택시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간다. 잠깐의 어지러움을 느낀다. 당장이라도 잠에 들 것만 같다. 뒷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는다. 창문을 연다. 꽃향기를 담은 바람이 시원하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잠시 달래 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배달 앱에서 음식을 시킨다. 5분만 자고 일어나자는 생각으로 알람을 맞춘 뒤에 이불을 덮는다.

웁, 입술에 무언가 닿아있다. 당황하며 눈을 뜨자 눈앞에 헤일리가 있다. 이제는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기를 간절히 욕망한다는 것이다. 헤일리와 격하게 키스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한 꿈을. 헤일리는 입술을 떼고는 부끄러워하는 내 얼굴을 보고는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너무 세게 쓰다듬어서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머리가 헝클어진 모습을 보고 헤일리와 나는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강아지가 이런 기분인가 싶다.

헤일리는 나의 손을 잡고 서둘러 가게를 나간다. 헤일리는 해변가를 지나 바위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제는 해가 진 바다 너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불꽃이 올라온다. 천천히 올라가던 불꽃은 큰 소리를 내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떨어진다. 마치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형형색색의 불꽃에 나와 헤일리는 눈을 떼지 못한다.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내 머릿속이 한순간에 텅 빈 느낌이다. 지긋지긋한 학교와 경쟁자들의 견제, 부모와 교사들의 기대, 그리고 불안감과 무서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이 잠에서 깨지 않고,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헤일리를 따라서 달린다. 우리는 그 모래사장 위에서 서로를 꼭 껴안는다. 내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뛴다.



귀가 멍해질 만큼 큰 소리가 들린다. 의식이 들지만 눈을 뜨지는 않는다. 곧 부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훈아! 너 왜 자고 있어. 지금 학원에 가 있어야 할 시간 아니야? 지금 뭐 하는 거야.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정신 안 차려?”

눈을 떠서 급하게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7시 40분, 평소라면 내가 수학학원에 가 있을 시간이다. 수학학원 선생님으로부터 5통의 부재중 전화, 같이 학원을 다니는 민서로부터 3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학교가 끝난 뒤에 집에 온 뒤로부터 3시간 40분이나 잔 것이다.

나는 베개로 양쪽 귀를 막고 이불까지 덮어버린다.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훨씬 더 아픈 것처럼, 행복한 꿈속의 생활이 생생해서 더 좌절스럽다.

행복했던 그 순간들을 명확히 기억하기 때문에 현실이 더욱 애통하다.

행복의 크기를 비교하니, 현실이 더욱 비참해진다.

내가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불에 몸을 숨기고만 있자, 부모는 나의 팔을 잡아서 일으키고는 의자에 앉힌다.

“너 똑바로 공부해. 이번에는 꼭 전교 1등 해”

그러고서는 수학 학원 선생한테 전화를 하며 나간다.

나는 잠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눈을 깜빡인다. 오늘 꿨던 꿈을 상기시켜 본다. 헤일리, 노을, 바람, 바다, 모래, 불꽃. 나의 모든 감각들이 아름다운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잠을 더 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가방에서 필통과 책을 꺼낸다. 이제는 우리 학교의 작년 기출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작년에 나온 문제를 보고 올해 나올 만한 서술형 문제를 예상한다.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강조한 조선 시대 시조의 시어를 외운다. 서술형을 대비하여 시어의 의미와 시어 하나하나를 세밀히 외워둔다. 이 시조와 연관되어 있는 작품도 공부하여 외부 지문을 대비한다. 펜을 놓는다. 시계를 보니 10시다. 잠 때문에 수학 공부를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감이 든다.

피곤하지만 내 가슴속 깊은 어딘가에서 자꾸만 올라오는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서 틀렸던 수학 문제들을 다시 풀어본다. 11시 30분이 되었다. 낮에 거의 4시간이나 잤음에도 내 몸은 피곤하다며 소리치는 듯하다. 내려오는 눈꺼풀을 잡아가고, 찬 바람을 쐬어 가면서 공부를 계속한다. 1시 30분이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지만 공부가 끝나자 오히려 생기가 돋는 기분이다. 눈꺼풀이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자 아예 눈을 감은 채로 식탁으로 가서 우유를 마신다. 그 후로 바로 침대로 가서 시체처럼 눕는다. 나의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차차 의식을 잃어간다.



눈을 뜨자 아름다운 성이 보인다. 핑크빛 벽에 푸른색 벽돌로 만든 뾰족한 지붕. 마치 디즈니 영화에서 나올 만한 아름다운 섬이다. 성의 배경이 되는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이제는 꿈이 기대되기까지 한다. 다음에는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 지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에 가득 찬다.

성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어린아이들이 걱정 없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닌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교복을 입고 밝은 모습으로 웃는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도 아이를 닮아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나도 저런 기억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아주 옛날이었겠지.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나의 현재 현실 속 모습과는 대비되어 부럽다. 여유롭게 놀이공원 안을 걸어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금방 배가 고파진다. 놀이공원 안에 있는 식당을 찾다가 핫도그 가게를 발견하고 자연스레 다가간다. 추로스 가게에는 한자와 일본어가 섞인 메뉴들이 크게 붙어 있다.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나는 그동안 배운 일본어로 메뉴를 해석해 보고자 노력하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입시를 위해서, 다른 과목 공부량을 유지하면서 일본어 1등급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좋게 말하면 효율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얍삽하고 얄팍하게 공부한 나의 지식은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또다시 회의감이 든다. 나는 번역기를 꺼내서 메뉴를 주문하고 ‘히또츠’란 일본어 단어를 강조하며 말한다. 배운 일본어 단어 중에, 지금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문다.

핫도그를 먹으면서 걷는다. 하늘을 보니 미세 먼지가 하나도 없는 듯하다. 하늘 특유의 푸른색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문득 저 구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저 구름처럼 하늘을 떠 다니며 여유롭게, 주변 하늘과 땅의 것들을 보고 싶다.

강한 햇빛이 나의 눈을 비춘다. 잠시 시야가 어두워진다.

정신이 든다. 감고 있는 눈을 뜨는 것이 두렵다. 부모의 계속되는 부름에 결국 침대에서 터덜터덜 일어난다. 눈을 감고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익숙하게 먹는다. 언제나처럼 약간의 밥을 남기고 샤워실로 간다. 눈을 감고 샤워를 한다. 세면대에 붙어 있는 벌레가 거슬린다.

나는 무표정으로 벌레를 찌그러 뜨린다. 벌레의 몸에서 노란색과 회색빛이 섞인 찐득한 체액이 튀어나온다. 나는 벌레의 시체를 휴지로 싸서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물로 신발의 묻은 벌레의 체액을 흘려보낸다.

다크서클이 전보다 더 내려와 있다. 광대뼈와 갈비뼈는 전보다 더욱 튀어나와 있는 듯하다.

한숨을 푹 쉰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눈이 뻐근했던 것이 약간은 풀린 느낌이다.

차를 타고 학교에 간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학교에 도착한다.

시험이 곧이어서 그런지, 선도부 교사가 보이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서 2학년 2반으로 간다. 수업을 듣고 수업 내용을 복습하고, 삼각함수 그래프를 그리고 주기를 찾고, 일본어 단어를 외우고, 국어 문학 문제 정리본을 다시 읽는다. 칠판에는 D-4라고 적혀 있다.

점심 종이치고 같은 반 애들 몇 명과 밥을 먹으러 간다. 시험 기간에는 다들 하는 말이 거기서 거기이다.

벌써 시험이 이만큼밖에 안 남았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빨리 시험 끝나고 놀고 싶다는 등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이다. 또다시 잠에 들고 싶다.

오늘도 친구들은 먼저 식사를 끝낸다. 그러고서는 저마다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 있다. 점심을 먹고 자습을 하러 간다.

시험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자습실이 시끄러워졌다. 저마다 자신이 공부를 덜 했다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한 마디씩 하거나 걱정을 내비친다. 견제와 기만이 교실에 가득 찬다. 이 교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환멸 난다. 나는 교실을 나가서 혼자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불이 꺼진 영어 교실을 찾아서 다시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식곤증 때문인지 눈꺼풀이 계속 처진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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