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형형 색색의 단풍이 있다. 바람에 의해서 떨어지는 단풍들이 내 뒷머리와 목을 간지럽힌다.
뒤를 돌아보니 아름다운 하늘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단풍나무들이 보인다. 온 세상이 붉은빛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웅장함에 놀란다. 붉은빛, 노란빛의 단풍 사이로 햇빛이 비춘다. 반짝이는 단풍들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잠시 단풍나무 아래에 누워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수많은 단풍나무들 사이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일본 신사가 보인다. 짙은 고동색과 밝은 색의 나무를 섞어서 만든 신사는 무언가 형연할 수 없는 고유의 분위기를 뿜어댄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경건해진다. 시원한 바람이 나를 감싼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하나씩 떨어지는 단풍은 신사의 건물들과 잘 아우러져서 고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아릅답다. 떨어지는 단풍을 잡으려 이리저리 손을 뻗어 본다.
의식이 든다. 눈을 떠보니 영어가 적힌 칠판과 잘 정리된 책상들이 보인다. 5교시 종이 울린다. 휴대폰 배경 화면에 있는 시간표를 보려 핸드폰을 킨다. 물리 수업을 들으러 물리실로 가는 길에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본다. 유튜브 썸네일에 익숙한 사진이 보인다. 바로 내가 방금까지 꾸고 있던 꿈에 나온 아름다운 일본의 단풍과 신사이다. 내가 3분 정도 본 영상이다. 그 영상에 나온 장소가 내 꿈속에 배경이 된 것이다. 서둘러 시청 기록을 뒤져본다.
처음 꿈을 꿨던 유럽의 높은 산맥과 광활한 초원도, 붉은 노을의 하와이 바다도, 디즈니랜드와 단풍과 신사도 모두 내가 즐겨보는 여행 유튜버 영상의 나온 장소들이었다. 이제는 내 꿈에 대해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다. 내가 꾸는 꿈은 내가 봤던 유튜브 영상에 나온 관광지에 나를 데려다준다. 그 영상 속의 이미지가 꿈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왜 나는 이런 꿈을 꾸는 것이지. 자유로움을 원하는 나의 욕망이 반영된 것인가. 계속해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 이유에서 내가 이런 황홀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깨고도 그 꿈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 삶의 하나의 숨구멍이 바로 그 꿈이라는 것이다.
“이도훈! 뭐 하냐 너. 딴생각하냐.” 물리 교사가 나한테 말한다.
“너 이번 시험에 1등 할 자신 있나 보네? 딴생각하고 한 눈 팔고 있는 거 보면. 너 그러다가 큰코다친다. 공부에는 끝이 없어. 시험 보기 바로 몇 초 전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공부해야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거야. 정신 차려.”
듣기 싫은 소리지만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완벽한 준비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선의 준비는 존재한다.
그것은 그 상황이 닥칠 때까지 끝까지 준비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물리 교사가 나의 담임이기 때문이겠지. 실적으로 밀리니 부장 교사가 되기 위해선 전교 1등을 가르친다는 명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전교에서 4등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저 물리 교사는 나를 통해서 다른 교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나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위선적이다.
구역질이 날 뻔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낸다.
물리 수업이 끝나자마자 물리 교사는 나를 불러서 조언을 가장한 경고를 한다.
“너 이번에 전교 1등 해야 네가 원하는 인서울 최상위 의대 쓸 수 있어. 너 내신으로는 지방대 의대도 안정권은 아니야. 널 위해서야 도훈아.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 내보자.”
또다시 구역질이 난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구역질한다.
나는 물리 교사에게 별거 아니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교실을 뛰쳐나온다. 지금 당장 꿈을 꾸고 싶다. 그 꿈속으로 도망가고 싶다.
나는 같은 층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점심에 먹은 음식들을 모두 토해낸다. 목이 따갑고 콧구멍이 아프다. 더 이상 토해낼 것이 없을 때까지 토해내고 나서야 구역질이 멈춘다.
교실 칠판에 적힌 D-4라는 글자를 본다. 당장 지우개로 저 글자를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미래를 위해서 성공해야 한다. 심호흡한다. 정신 차리자. 이제는 진짜로 다른 곳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때이다. 반으로 들어가서 물리 수업을 복습한다. 언제나와 같이 쉬는 시간에도 공부한다. 7교시가 끝났다. 담임교사는 종이 치기 무섭게 들어와서는 집에 가라고 한다. 나는 담임교사가 또다시 나에게 조언으로 포장한 족쇄를 선물할까 두려워 서둘러 반을 뛰쳐나간다. 택시를 부른다. 택시에 타자마자 배달 음식을 시키고 인강을 튼다. 시험 범위에 있는 문학작품 정리본을 본다. 집에 도착하여 문 앞에 있는 음식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계속해서 인강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인강을 보면서 밥을 먹으니, 30분 만에 배달 음식을 모두 해치운다. 문밖에 인강을 틀어 놓고 양치를 한다. 피부에 화장품을 바를 때에도 인강을 틀어 놓는다. 다른 때와 다르게 책상에 바로 앉는 것에 성공한다. 10시까지 쉬지 않고 공부한다. 거실에 나와서 잠깐 스트레칭 후에 우유를 마시면서 인강을 본다. 11시까지 공부를 더 하고 일찍 잠에 든다.
꿈을 꾸지 않았다. 진짜 그 여행 영상 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지금 나에게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이고 불안이기 때문일까.
나는 얼른 준비하여 학교로 간다. 이제는 나에게 꿈을 꾸고 싶다는 욕망이나 꿈을 꿀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다. 평소와 같이 하루 종일 공부한다. 기만과 견제를 멈추지 않던 학생들이 이제는 그 가볍던 입을 다물고 펜만을 움직인다. 고요한 분위기가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학교가 끝나고는 학원을, 학원이 끝나고는 집에 온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학생들과 경쟁하고, 집에서는 나 스스로와 경쟁한다.
D-1. 아직까지 시험을 본다는 것이 실감 남지 않는다. 1교시부터 7교시까지의 힘겨운 자습 시간이 끝나고 시험 주의 사항과 안내 방송이 시작된다. 대부분이 안내 방송을 듣지 않고 공부를 한다.
언제나처럼 마지막 멘트는 같다.
“여러분이 공부하신 만큼, 노력하신 만큼 내일 시험에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뭉클해진다. 왠지 나의 불안과 걱정을 보듬어 주고, 안심시켜 주는 기분이 든다.
밥 먹는 시간 빼고 계속 자습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학원 직전 보강은 6시부터이다. 나는 그전에 머리를 식히고자 학교 뒷산에서 혼자 밥을 먹기로 한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 반 애들이 나에게 학원에 가기 전에 같이 밥을 먹자고 한다. 나는 시험 대비해서 마지막으로 정리할 것이 있다고 대충 둘러대면서 먼저 반에서 나온다.
이제는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얘기도 귀찮고 피곤하다. 어떠한 생각도 하기가 싫다. 나는 애들이 몰려오기 전에 학교 앞 분식집에 가서는, 미리 준비되어 있는 김밥 2줄이 포장되어 있는 봉지를 받아 든다. 그러고서는 서둘러 학교 뒷산에 올라간다. 다행히 내가 학교 뒷산에 올라갈 즈음에
애들이 학교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종례를 아예 하지 않는 우리 반 담임교사가 좋은 교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동안 든다.
계단을 올라서 뒷산의 정상에 도착한다. 이제 막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벤치에 앉아서 김밥을 먹는다. 멍하니 누런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리에 가득 차 있던 걱정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산소가 뇌에 들어오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아프던 머리가, 이제는 안 아프다 못해 맑아진 느낌까지 든다.
풍경을 바라보며 먹다 보니, 배가 불러서 김밥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쉬움에 남은 김밥을 꾸역꾸역 먹어댄다. 어느덧 대치동의 학원가를 비춰주던 해는 지고, 화려한 듯 빛을 발광하는 학원 간판들만이 보인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고, 가방을 메고, 뒷산을 내려간다. 또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만 같다.
학교 뒷산에서 내려와서 운동장을 지난다. 학교에는 아무도 없는 듯이 조용하다. 나는 학교에서 벗어나서 학원으로 걸어간다.
길에는 시험 대비 자료나 단어장들을 들고, 걸어 다니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그중에는 시선을 고정해 둔 채 길을 가면서도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다수이다. 그들을 보니 다시 불안감이 든다. 머리가 더욱 조여 온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으로 인강을 보면서 학원으로 향한다.
학원 건물 1층에는 교복을 입고 수학 시험 난이도에 대해서 한창 열띠게 얘기하고 있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교복을 보니 우리 학교 옆에 있는 대치고 학생들이다. 시험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긴장감이 차오른다. 그들은 최선 영어와 바른 과학 학원이 있는 4층에 내린다. 아마도 둘 중 한 과목의 직전 보강 수업일 것이다.
나는 대원 국어가 있는 6층에 내린다. 학원에 들어가니 학원의 원장이 나를 반긴다.
이번에는 국어 1등급은 당연하고 전교 1등을 해버리라는 다소 부담이 되는 응원을 한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강의실로 들어간다. 강의실 안에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몇몇이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일 나올 것 같은 내용을 몇 개 짚어달라고 한다. 성가시다. 내가 공부해야 할 것을 보는데도 바쁜데 도움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다.
하지만 그 맘을 티 내지 않고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빠르게 핵심만 집어 준다.
내 국어 특강은 진짜 특강을 하러 온 국어 강사가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끝난다.
나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이제껏 해왔던 직전 보강 수업과 유사하게 시험 범위 내의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유사한 외부 지문 설명이 이어진다. 수십 번을 넘게 들었던 내용을 귀로 흘리다가 외부 지문 설명이 나오자 귀를 기울인다. 수업을 듣는 중간중간에 나올 것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 본다. 언제나와 같이 강사의 다소 부담스러운 응원으로 수업이 끝난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강의실에서 벗어난다. 학원 원장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을 뒤로하고 학원을 빠져나간다. 학원에서 나가니 주변 학원의 셔틀버스들과 각종 고급 세단을 끌고 온 대치맘들이 학원 앞에 단체로 차를 대고 있다. 포르셰, 벤틀리, 벤츠, BMW, 아우디, 제네시스. 나는 여기 서 있는 차만 해도 얼마일지 대충 계산해 보다가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만둔다. 이어폰을 끼고 인강을 들으면서 집으로 향한다. 대치동의 밤은 길고, 화려하다. 공부만 하는 동네가 왜 이렇게 화려한지 모르겠다. 눈에 잘 띄는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초록색으로 빛나는 학원 간판과 수많은 차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눈부실 정도의 빛들, 가로등 불빛들.
대치동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아마 이곳이 대한민국의 최대 유흥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화려해 보이는 대치동이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벗어나고 싶은 지옥인지도 모른 채로. 나는 이 화려한 동네가 보이는 대로 정말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곳이 슈퍼스타가 내한 공연을 하는 콘서트 장이라면, 물총을 쏘며 놀 수 있는 축제의 장이라면. 평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던 익숙한 거리를 보면서 갖가지 생각이 다 든다. 이게 시험 전 날에 뭐 하는 거람.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집이 2층이지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계단을 올라갈 힘이 없다.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내 방으로 간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빠르게 한다. 내일 시험 볼 과목을 한 번 더 볼까 고민하지만, 그냥 잠에 들기로 한다. 그렇게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드디어 시험 당일이다.
아직까지 시험을 본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큰 긴장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꿈을 꾸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려다가 그만둔다.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간다. 컨디션은 좋다.
1교시 시험 예비종이 치고 교사들이 반으로 들어온다. 나의 자리는 맨 뒤이다.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자리는 앞에서 왔다 갔다 거리는 교사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교사가 시험지를 안 보이게 신경 쓰면서 맨 앞자리 책상에 올려둔다. 종이 쳤다. 나는 시험지가 빨리 내가 있는 마지막 끝자리까지 오길 기다린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침착하게 풀어나간다. 다 아는 문제들이고 예상했던 문제들이다. 서술형 5번, 외부지문이 나온다. 시험 범위 안에 있는 시어와 의미가 비슷한 시어를, 시험 범위 외의 시조에서 찾아서 써야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외부지문으로 나온 시조를 처음 봤겠지만, 나는 이미 수능 공부할 때 많이 봤던 시조다. 침착하게 시험을 끝낸다. 모르는 게 없었다는 확신이 든다. 자신감이 붙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고 집에 간다. 택시비가 평소보다 1천 원 더 나온다. 하지만 시험을 잘 본 것 같아서 기분 좋게 내고 내린다.
집에 올라가자마자 채점을 한다. 예상대로 국어 100점이다. 자신감이 붙는다.
시험이 끝난 후 7일 동안 미친 듯이 놀았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드라마와 영화들도 모두 보고, 친구들과 한강에 가서 치킨을 뜯고 놀았다. 하지만 노는 와중에도 친구들은 시험에 대한 얘기를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우리는 잠시도 입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나와 태우를 제외한 나머지가 한 마디씩 보탠다. 시험을 잘 봤는지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시험의 체감 난이도, 이의 제기할 만한 게 있는지, 자신 같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이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자조 섞인 말을 쏟아 낸다.
공부를 못하면 살아갈 날에 대해서 불안을 느껴야 하는 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여기서 내가 위로나 조언이라도 하면 너는 공부 잘해서 좋겠다는 등의 부담스러운 부러움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다.
태우도 가만히 있는 듯하더니 예상외로 말을 꺼낸다. 조용하던 태우가 갑자기 말을 한다는 것에 당황하지만 티 내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회의를 느껴. 본래 친구라는 것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 아니야? 추억을 함께 만들고 힘든 경험, 좋은 경험을 같이 해야 할 친구들이 이제는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겨. 때때로 누군가는 경쟁자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서로 간의 신뢰를 깨뜨리기도 하지.
우리는 친구에게 맘 편히 우리의 성공과 기쁨을 말할 수 없고, 실패와 좌절감, 약점을 드러내서는 안 돼. 우리는 매일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어.”
나는 태우의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태우가 회의를 느끼는 그 과정을 누구보다 충실히 따르고 있는 나였기에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나의 성공과 기쁨을 드러내어 시기, 질투, 견제를 받아서는 안 됐고, 나의 약점과 슬픔을 드러내서 무시받고 상처받아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들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면 너는 미래를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데? 네가 하는 거라고는 책 읽고, 글 쓰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것밖에 없잖아. 나는, 아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 모두는 좋은 대학을 가서, 미래의 조금 더 나은 삶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야.”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 말을 듣고 태우는 잠깐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이제 시험도 끝났는데 이런 얘기 그만하자. 다들 안 배고파?”
태우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분명 마음속으로는 태우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나도 모르게 모진 말이 나왔다.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한심한 방어였다.
나는 그 이후로 집에 갈 때까지 태우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태우는 평소처럼 차분했고 내가 했던 말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