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길거리 전도는 복음의 방식인가
1. 지하철에서 받은 과태료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다 한 게시물 앞에서 손을 멈췄다. 지하철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신앙인이 과태료를 부과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게시물 작성자는 분노하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이것은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처사다." 댓글란에는 비슷한 반응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복음 전파인가, 아니면 공공질서 위반인가?
나 역시 길거리 전도를 수없이 받아왔다. 지하철역 앞에서, 번화가 한복판에서, 대학교 정문 앞에서. 그때마다 나는 똑같은 답을 했다. "이미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자들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다. 때로는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는지, 언제부터 다녔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행위 그 자체였고, 상대방이 실제로 복음을 받아들였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인 듯했다.
길거리 전도는 한국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의 열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교회마다 전도부가 있었고, 정기적으로 길거리로 나가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선교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길거리 전도는 복음을 전파하기보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일이 더 많아졌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길거리 전도는 과연 복음의 방식인가?
2. 길거리 전도의 역사적 정당성
공평하게 말하자면, 길거리 전도에는 성서적 근거가 있다. 예수님은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셨고, 제자들은 광장과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했고,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설교했다. 초대교회는 공적 공간에서 복음을 선포했고, 그것이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도 길거리 전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80년대 한국 교회 부흥기, 길거리 전도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는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호의적이었고, 사람들은 길거리 전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길거리 전도를 통해 교회로 나왔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복음 전파의 열심 자체는 결코 폄하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함, 선교 명령에 순종하려는 태도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 대부분은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
3. 시대 변화와 방법론의 괴리
2020년대 한국 사회에서 길거리 전도는 더 이상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아졌다. 길거리 전도를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귀찮다는 표정, 피하려는 몸짓, 때로는 노골적인 거부감. 전도지를 받아 들고도 몇 걸음 가지 않아 휴지통에 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했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기독교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길거리 전도를 통해 기독교를 '강요하는 종교',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종교'로 인식하게 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길거리 전도에 대한 불만과 조롱이 넘쳐난다. "또 예수쟁이가 시끄럽게 하네", "길거리 전도 진짜 짜증 난다"는 반응이 일상적이다.
전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길거리 전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전도 대상이 아니라 '방해 대상'으로 인식되고, 복음 전파가 아니라 '소음 발생'으로 여겨진다.
방법의 고집이 복음 전파를 오히려 막고 있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1970년대의 방식으로 2020년대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효과가 없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악해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라고. 과연 그런가? 정말 문제는 세상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방법에 있는가?
4.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 전파와 질서 준수
성서는 복음 전파를 명령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이것은 지상 대명령이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했는지를 보여준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복음을 전했다(사도행전 3장).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다(사도행전 8장). 바울은 각 도시를 다니며 회당과 광장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사도행전 13~28장). 복음 전파는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나 성서는 동시에 질서와 국법 준수를 강조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로마서 13:1-2)
베드로 역시 같은 맥락에서 권면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베드로전서 2:13-14)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도 썼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린도전서 14:33). 이 말씀은 예배의 질서에 대한 것이었지만, 신앙인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원리다. 하나님은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국법을 어기고 복음을 전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사도행전 4:19)고 답했다. 사도행전 5장에서도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 5:29)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사도들의 불복종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직접적인 신앙 전파 금지 명령이었다. 그들은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불복종은 오직 복음 전파 자체가 금지되었을 때만 발동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복음 전파를 금지하지 않는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 온라인이나 서적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다만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행위를 규제할 뿐이다. 이것은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그런데 과태료를 받으면서까지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비신자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들은 법도 지키지 않는구나. 저것이 기독교의 모습인가?" 복음의 신뢰성은 그렇게 무너진다.
복음 전파와 질서 준수는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서를 지키는 것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법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규칙을 따를 때, 비신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5. 열심은 인정하되, 지혜를 요청한다
나는 길거리 전도자들의 열심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영혼을 사랑한다.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추운 거리에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인가?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욕까지 들으면서도 계속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헌신인가? 그 열심만큼은 분명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지혜가 필요하다.
뱀같은 지혜란 무엇인가? 상황을 판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비둘기같은 순결이란 무엇인가? 순수한 동기와 깨끗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둘을 함께 요구하셨다.
길거리 전도는 열심은 있으나 지혜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렇게라도 전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방법의 효율성을 간과한다. 우리는 "우리의 진심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하며 타인의 반응을 무시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복음이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식의 변화는 복음 전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라 지혜다.
6. 시대에 맞는 전도 방식의 모색
그렇다면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방법이 있다.
첫째,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하라. SNS, 유튜브, 블로그는 현대인들이 정보를 얻는 주요 채널이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받은 전도지는 버리지만, 자신이 검색해서 찾은 콘텐츠는 끝까지 본다. 양질의 신앙 콘텐츠를 만들어 온라인에 올려라. 그것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다.
둘째, 삶으로 전도하라. 가장 강력한 전도는 말이 아니라 행위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직장인, 이웃을 돕는 시민,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부모의 모습이 어떤 전도지보다 효과적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는 말씀을 기억하라.
셋째, 관계 중심으로 전도하라. 일회성 길거리 만남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복음을 나누라. 직장 동료, 학교 친구, 이웃 주민과의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나누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관계가 없는 곳에 신뢰도 없고, 신뢰가 없는 곳에 복음의 수용도 없다.
넷째, 필요에 응답하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며 복음을 전하셨다.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병든 이에게 치유를, 외로운 이에게 위로를 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며, 섬김의 자리에 설 때,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브리서 13:8). 그러나 방법은 변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고 말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되었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지혜다.
7. 복음의 방식을 다시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전도하는가? 전도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길거리 전도는 복음의 방식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과거에는 그랬을 수 있으나, 지금은 재고가 필요하다. 길거리 전도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고집할 수도 없다.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의 소통 방식이 달라졌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방식의 고집이 복음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말 영혼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우리는 더 지혜롭게, 더 효과적으로, 더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복음은 영원하지만, 방법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21세기에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