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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칭맘 그레이스 Mar 08. 2023

흔하게 주고받는 상처에 관한 진실

중년, 사랑이 꽃피는 계절

우리는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상처를 주고받음에 있어 일방적인 경우는 없다. 대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숨 가쁘게 오가며 다시 말해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상처로 얼룩진 삶’을 이어간다.


상처에 대한 경험은 대체로 부정적인 기억과 정서를 남긴다. 상처는 신의를 가볍게 깨거나 계의 균열을 가져오고 과하게는 인간 기피혐오 증세를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상처에 대한 쓰라린 기억과 불편한 감정에 둔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이토록 진 빠지는 상처의 주고받음… 그 늪에서 우리는 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할까?


인간은 의외로 나약하고 모자란, 실수투성이의 불완전체다. 대개는 자신에게 너그럽고 타인에게 냉철하며 욕망덩어리인 데다 편협하기까지 하다. 50년을 넘겨 살면서 체득한 인간 실체에 대한 나의 결론이다.

충만하고 완전한 상태라면 상처가 틈 탈 여지도 없다. 상처는 우리의 약한 부분, 미숙하고 부족한 틈을 타고 들어와 반갑지 않은 똬리를 튼다.


내 기억 어디쯤에는 리스트가 하나 존재한다. 상처 준 사람들에 관한 기억이 보관된 리스트. 그러고 보면 난 참 뒤끝 있는 여자다ㅋㅋㅋ. 기억력까지 좋아 그들이 던진 폭력적인 말들을 똑똑이 잘 기억한다. 그리고 가끔 한 번씩 케케묵은 상처들을 꺼내 들여다보곤 하는데… 자학도 아니고 내가 왜 이러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찌 됐든 이런 식으로 상처는 나 자신의 일부가 된다.

상처는 언제 꺼내 들어도 참 아프고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 같다.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하며 스스로를 후벼대는지… 내가 생각해도 참 고약하다.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나는 피해자'라는 값싼 동정을 스스로 쌓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관계에서의 부딛김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나에게 상처를 주기는 한 것일까?


상처의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해 보면, 상처는 상대의 말이나 태도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혹은 심리적 아픔을 경험하고, 그 아픈 흔적이 남게 되는 과정이다. 인간관계를 맺고 살다 보면 상대의 납득할 수 없는 언행이나 무례한 태도에 대해 나름의 해석이 있어야 입장 정리가 가능할 때가 있는데 여기서 문제는 내 나름의 해석이, ‘나 편한 대로의 해석’이 되기 십상이라는 데 있다. 난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나 편한 대로의 해석으로 일단 상대를 정죄하고 스스로를 동정하며 신파를 써 내려간다. 신파의 제목은 언제나 ’ 상처받은 가엾은 영혼‘.  ‘난 상처받은 자, 상대는 상처를 준 자’ 명쾌한 선악구조의 이분법이 적용된다. 대체 무슨 근거와 자격으로.....  내가 아닌 또다른 인격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의 일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보는 것, 보고 느끼는 것, 판단하는 것 모두가 너무나 불확실하고 불완전할 뿐이다. 상대의 머릿속을 꿰뚫어 볼 능력도, 그의 의도를 정당하게 파악할 능력도 내겐 없다는 게 팩트다. 그러다 뒤늦게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이것은 상처에 대한 사고 전환 계기가 된다.


상처에 대한 이해와 대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하다 보면 뭔가 잘 맞지 않거나 세계관의 결이 많이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된다.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들과의 교제는 언제나 불편하고, 정치적 견해나 지지 정당이 다른 경우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런 경우들이라면 조심한다고 해도 나의 태도에서 어느 정도의 언짢음과 불쾌감이 드러났을 수 있다. 어른스럽지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지만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다 보면 결국 돈독했던 관계에도 실망과 분노 등의 감정들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상처가 너무 깊을 때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를 끊기 전에, 상대를 무작정 악당으로 몰아가기에 앞서 그동안 상대가 보여준 고맙고 따뜻했던 배려 신의를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줄곧 받아 누린 배려와 신의를, 몇 차례 받은(받았다고 믿는) 상처와 반드시 저울질해 보았으면 한다. 불쾌감을 일으킨 몇 차례의 말과 태도만으로 그동안 받은 배려와 신의를 깡그리 무시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인간관계가 이어지는 한, 상처의 주고받음은 늘 우리와 함께다. 혀로 맛을 감별하듯 말의 진의와 그 사람의 진정성을 감별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를 곧잘 속인다. 관계 안에는 감언이설도 난무한다.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몇 번의 언쟁이나 실수보다 평소 그가 보여준 신의와 태도라고 생각한다. 평소 보여준 성품에 대한 고려가 있은 다음에 관계를 정리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상대방이 불완전한 만큼이나 나 역시 불완전하므로…


또 상대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굳어진 상처나 열등감의 발로로 무례하게 굴었을 수 있고, 뭔가 일이 잘 안 풀려 모든 것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단지 화풀이를 했던 것일 수도 있고, 컨디션과 감정 조절의 실패로 저지른 실수였을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상처받았을 때, 정확하게는 상처받았다고 느낄 때 상대방인 보인 부적절한 언행의 실체일 수 있다는 것. 그에게는 애당초 우리에게 상처 줄 의도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그들이 본래 불손하고 배려심이 부족해서 혹은 자기 경험에 갇혀 생각이 모자라거나 이기적이어서 보인 무례한 태도였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라면 실로 사람 됨됨이의 문제 즉 그들 자신의 문제이지 엄밀히 내 문제는 아니다. 상대의 인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언행에 내가 상처받을 일인가? 그냥 툭툭 털어버리면 될 일이다.

혹여 악의를 갖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자 했어도 이 또한 그들 인성과 못남의 소치다. 그뿐이다.


우리는 경제력, 차림새, 외모, 사회적 지위, 학벌 등으로 상대를 얕보거나 무시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 이들을 겪는다. 이야말로 그들의 수준이며 그들이 문제인 것이지 우리와는 무관하다. 그들이 한심하고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누구도 그런 근본 없는 잣대로 우리를 폄하하거나 깔볼 수 없듯이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누구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이게 팩트고 상처에 관한 진실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제 즉 열등감, 낮은 자존감, 신뢰부족… 등 순전히 자신이 겪고 있는 정서적 문제로 상대를 곡해했을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상대와 무관하게 자기가 일방적으로 상대의 태도를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상처받았노라고 믿어 버린 후 마음 아파했던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는 당연히 우리가 상처받은 것을 알 리 조차 없다. 왜? 애초에 상처 줄 어떤 의도도 없었을 테니까. 이게 팩트다. 상처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이다.


상처와 관계에 관한 진실


결론적으로 상처와 관계에 관한 진실은 우리 주변에는 악당이 많다기보다 미성숙한 사람이 많을 뿐이라는 것 즉 상처는, 상처 주려는 나쁜 마음(의도)에서 빚어진 결과라기보다 각자의 인격에 관한 문제로, 또 받아들이는 인지과정의 문제로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상황은 상처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다.


상처받은 자’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자’ 로의 입장 전환은 상처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원망과 미움의 지옥에서 풀려나오는 계기가 됐다. 오해오판, 오히려 나 자신의 한계가 상처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원망스러웠던 이들에게 도리어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내가 본인들은 자각도 하지 못하는 일로 상처받고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또 얼마나 놀라고 괴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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