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십삼 년 십일월의 이야기
늦은 가을비가 내리는 새벽, 우산을 꺼내 들고 연탄을 보러 간다. 떨어진 감잎들은 밟아도 소리가 없고 아직 연탄은 뜨겁다. 손님처럼 사라진 꿈을 더듬거리듯 조금 더 연탄을 태워야 할까. 아홉 구짜리 구멍이 내 눈동자에서 초점을 잡는다.
기름보일러와 연동돼 돌아가는 연탄보일러는 난방비 절감을 위한 전 집주인의 묘안이었겠지만 나는 연탄을 가는 것이 싫다. 매캐한 일산화탄소가 폐까지 단숨에 중독시켜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나는 숨을 최대한 멈춘다.
이웃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 집에도 불이 켜지고 연탄을 갈러 나오며 늘 그렇듯 마른 기침소리가 들린다. 가끔 처마 밑에 나와 울퉁불퉁한 마당을 따라 대문도 없는 골목길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어르신. 친구 분은 계신지, 자녀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지 궁금해 지는 아침이다.
곧 한 겨울이 오면 감나무 잎을 다 떨구고 그 나무 옆에서 한 번씩 웅- 하며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 조차 따뜻하게 들리겠지. 언젠가 리모델링도 해야 할 것이고. 아니 새로 지어야 할 수도 있는데. 오늘도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카톡 프로필 사진에 누리의 모습을 올리자 가족들과 지인 몇이 연락해 왔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강아지 키워?”
“응.”
“여자야? 남자야?”
“여자.”
“나중에 새끼 낳으면 한 마리 분양해 줘.”
분양? 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누리가 대여섯 마리만 낳아도 얼추 잡아…. 아니야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런 생각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노후 주택이라고 해도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구입 자금을 대기에 턱없이 부족해 은행에서 최대한 대출을 받았더랬다. 매월 대출금의 상환 기일이 올 때마다 분양하라는 그 말은 초승에 뜨는 달만큼 때때로 마음을 솔깃하게 했다.
혼자 벌어 세 식구 살기 빠듯한 형편에 강아지를 키우게 된 데다가 대출금, 큰아이의 대학 입학으로 인한 지출 등 투잡을 뛰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지출은 더 많아질 것이 뻔했기에 누리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의 효율을 나도 모르게 따지고 있었다. 누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경제적인 부분과 연결되자 난 속좁고 지극히 현실적인 가장의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의 마음이 그러거나 말거나 딸아이는 여전히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왔고, 누리를 가운데 두고 턱을 괴고 빙 둘러 엎드린 채, 마치 신기한 생명체라도 관찰하듯 눈동자를 꿈벅거려 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달라진 게 하나 더 있었다. 어쩌다 곁눈질로 본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딸아이는 자기 방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에서, 혹은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그 중간쯤에서, 때로는 자기 방문을 열기 1초 전쯤, 흥칫흥칫 어깨에 리듬을 태우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조금 더 절약하는 게 뭐 힘든 거라고. 지금까지 과소비하지 않고 산 덕분에 대출을 꼈지만 이사도 했고 월급도 조금씩이지만 오를 텐데. 염려마귀에 씐 사람처럼 석 달을 갓 넘긴 누리를 이용해 대출금 갚을 생각부터 했을까.
늦가을 산들이 낙엽을 다 떨구고 산의 몸이 훤히 드러나 보일 때마다 산도 부끄러울까?라고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졌었는데 이제 그 질문은 나를 향한다. 어떤 마음은 때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서, 들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지켜지는 일상의 평화는 또 얼마나 소중한지.
초보 견주라고 해서 누구나 나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터인데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돈 되는 일을 좀 덜 찾아 헤맸을까. 통장에 잔고가 두둑하지 않다고 해서 마음의 여유까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자신에게 했을 법한 말이 나에게 필요했음을. 그 말이 내 마음에서 잘 자라라고 톡톡 흙을 다지듯 다독거려 본다. 흔들림 없는 듬직한 나무의 씨앗이 되길 바라면서.
더군다나 오늘은 누리의 첫 산책날. 마음의 여유가 더 필요한 날이다. 목줄을 챙기고 배변봉투와 물병, 혹시 몰라 화장지와 간식까지 가방 칸칸이 넣어본다. 좁고 길쭉하거나 바삭하게 말라 끝이 말려 올라가거나 한 낙엽들 위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던 누리는 한참씩 먼 곳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큰 벚나무를 돌아, 금강정 처마 밑을 지나, 강줄기를 찬찬히 보고 돌아올 만큼 더디고 고요했다.
코앞까지 도착한 바람의 맛을 보려는 것일까. 갓 쪄낸 송편에 기름칠한 듯 반질반질하고도 작은 코는 실룩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푸르르 몸을 털기도 하고 잔디밭에서 뒹굴거리다 토끼처럼 깡충거리기도 한다. 그때 나는 보았다. 딸아이가 어깨춤을 추면서 짓던 미소가 누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괜히 울걱해졌다. 저 작고 어린, 엄마의 품을 떠나온 따스한 생명에게 넓디넓은 세상을 소개했다는 자부심. 아니면 누리의 미소에서 딸을 닮은 미소가 오버랩되며 이제 정말 가족이 되었다는 실감에서 나온 책임감이었으려나. 내 발걸음이 사뿐하게 빨라진다.
그런 나를 누리가 앞장선다. 좌우로 꼬리를 흔들면서. 우리의 집을 향하여.
*금강정: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봉래산 자락 밑에 있는 암자로 조선시대에 세워짐. 지금은 금강공원(에코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돼 주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