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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 Jul 10. 2024

시골 눈 시골 강아지

이천십사 년 일월의 이야기

중학생 때였다. 어느 겨울 아침 방문을 열었다가 눈이 타버릴 것 같아 냉큼 닫은 적이 있다. 눈이 무릎까지 찰 정도로 내려 아빠의 발자국이 만든 토끼길만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는 거실이나 욕실이 따로 없던 때라 건넌방 문을 열면 마당에 물펌프가, 안방 문을 열면 소 여물통이, 사랑방 문을 열면 가마솥과 마주하던 작은 산촌 마을에 살던 때였다. 덕분에(?) 우리 마을까지 시내버스가 오지 못했고 그날은 대부분의 시간을 눈을 쓸며 보냈다. 

  

오십 분 공부하고 쉬는 시간 십 분의 규칙이 사라지자 눈 치우는 것은 재미 그 이상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길을 새로 만들었다는 뿌듯함에 나는 빗자루에 턱을 괸 채 쓸었던 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이 길로 아빠는 장작을 가지러 가겠지. 이 길로 엄마는 월동 무를 꺼내러 가겠지. 오빠는 썰매를 타러, 동생들은 친구네 집에 갈 것이었기에. 그 모든 길 위에서 펼쳐질 풍경은 이미 찍어 놓은 낱장의 사진처럼 평화로웠다. 


늘 그렇듯 눈 치우기의 끝은 눈사람 만들기다. 아빠 눈사람, 엄마 눈사람, 아기 눈사람. 오며 가며 바라보는 눈사람 가족에서 나는 종종 우리 가족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지난한 살림살이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다하셨던 부모님. 눈사람처럼 오래, 말이 없이.  

   

그런 기억들 때문일까 눈을 좋아하게 됐다. 친구는 개띠라서 그렇다고 했지만 세상에 날리는 수많은 눈 중 같은 모양의 결정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더더욱 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투명하고 윤이 나며 어떤 날은 빠르게 내렸다, 어떤 날은 사뿐히 날리었다가 또 어떤 날은 꽃송이처럼 흩날리기도 하는. 측정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지닌 눈의 비교 대상을 난 아직 찾지 못했다.  


그때처럼 오늘도 눈이 많이 내렸다. 적당히 폭신한 에어매트 높이쯤 쌓였으니 적은 양이 아니다. 왠지 누리도 눈을 좋아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산책길에 나섰다.  


공원을 둘러싼 도로는 제설을 마쳤지만 기온이 낮아 반드러웠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너갈 때처럼 몸의 중심을 최대한 잡았다. 조심조심 누리를 안고 육 미터 도로를 건너는 동안 심장이 쫄깃거려 숨을 참아야 할 정도였다. 


길이 나빠서일까. 나뭇가지 위에 앉았던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공원은 고요했다. 고라니가 다녀갔는지 낯선 발자국이 서성거린 흔적만 보인다. 먹이를 찾아 공원까지 내려오는 고라니를 간간이 볼 수 있다는 마을 어르신들의 얘기가 사실인가 보다.

   

누리는 예감대로 눈을 좋아했다. 코를 박고 눈 속을 헤집고 다니더니 기어이 털썩 엎드린다. 그러다 다시 코로 눈길을 만들고 앞발을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장난을 친다. 시골 눈이 도시 눈과 다른 지는 모르겠지만 누리와 내가 밟고 있는 눈은 먹어도 될 만큼 깨끗하다. 누리가 코를 박고 쉴 새 없이 눈길을 만들어도 가만히 두는 이유다.

 

마법의 옷장을 통해 신비한 겨울 나라로 들어간 나니아연대기의 네 남매처럼 산책길 내내 아름다운 설경은 우리를 이끌었다. 솔잎 위로는 옛날 엄마가 해주던 감자붕생이 모양의 눈이 포슬포슬하니 마음을 녹여주었고, 붉은 단풍나무는 소복하게 쌓인 눈 때문에 더 붉게 보였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지르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가끔 산책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를 뒤쫓기 시작한 누리는 뒤쫓기만 할 뿐, 막상 고양이와 대면하게 되면 슬쩍 비켜선다. 얼마 전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가 호되게 당한 후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니까 뭔가 보여주기 위한 리액션인 셈. 

‘나도 고양이 쫓을 수 있어요. 한 번 볼래요?’  

  

이제 누리는 자기 이름에 반응하고, ‘손’ ‘앉아’ ‘간식’ ‘가자’라는 단어도 알아듣는다. 고양이를 쫓아갈 때마다, 그리고 얼마쯤 가서 사람으로 치면 머리를 긁적일 때마다 리액션 안 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 말을 가르치기가 참 어렵다. 어쩌겠나. 그냥 모른 척 옆에 가서 “누리야, 가자”라고 할밖에. 

  

그때 누리의 으쓱거리는 몸짓은 나만 보기엔 정말 아까운 그림이다. 윤기 나는 목덜미의 털을 날리며 경쾌하다 못해 힘차게 허공을 가르며 내리 딛는 발짓이란 귀여움의 진원일지도. 


어떻게 보면 누리는 지금 신나고 행복하다고 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리야, 그렇게 재미있어? 신나? 눈이 정말 많이 왔지? 내일 또 올까?”

누리 옆에서 쏟아지는 나의 이런 질문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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